우주, 나, 모낭충

by 노경문

어느 날, 커뮤니티에서 본 제목이 눈에 띄었다.

“성인의 99%가 갖고 있는 이것.”

클릭하니 모낭충 이야기였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장면은 징그럽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게 뭐지?’ 혐오와 수용 사이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의외로 오래 남았다.


모낭충은 피지선에 사는 미세한 생물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피부 트러블은 존재 때문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졌을 때 생겨난다.

평소엔 피부의 피지를 분해하고 생태계를 안정시키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이 작은 생명체는 들릴 듯 말듯 말을 건넨다.

“나는 원래부터 여기 있었어. 불균형은 관계의 문제야.”


감정도 비슷하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낯설고 버거운 존재처럼 느낀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감정들도 늘 내 안에 조용히 머물던 구성원들이다.

억지로 밀어내려 할수록 더욱 요동치고, 받아들일수록 조율의 여지가 생긴다.


감정은 불청객이 아니다.

삶의 리듬을 점검하게 만드는 내부의 신호다.



감정은 마음의 면역이다


우리는 감정을 종종 '기분'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한 체계다.


눈앞의 말 한마디, 오래 묵은 기억, 예기치 못한 긴장감.

그 모든 것이 마음의 리듬을 흔들고, 몸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무엇이 감정을 건드리는가?

때로는 말보다 느껴지는 공기,

때로는 오래전에 닫았다고 믿었던 문틈 사이로 들어온 빛 한 줄기.


감정은 물처럼 흐른다.

표면만 봐선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건 심리적 면역 시스템이 내보내는 신호이자,

삶의 불균형을 감지하는 정서적 센서다.


억제하면 잠깐은 평온할지 모른다.

그러나 감정은 눌러둘수록 면역처럼 약해진다.

마치 과도한 면역억제제 아래서

몸이 스스로의 복원을 포기하는 것처럼.


실제로 만성 스트레스는 코르티솔 호르몬을 과잉 분비시켜 면역세포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매일 회사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던 직장인은 반복되는 설사와 구내염에 시달렸고,

시험을 앞두고 잠을 줄이던 학생은 감기조차 낫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고통은 단순한 건강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을 감추고 외면한 결과였다.


반대로, 마음이 몸을 회복시키는 경우도 있다.


플라시보 효과는 단순한 심리적 착각이 아니다.

그건 신체의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믿음의 힘이다.


진짜 약이 아님에도 두통이 사라졌다거나,

식염수 주사만으로 백혈구 수치가 회복된 사례도 존재한다.

물리적 치료 없이도, "나아질 수 있다"는 해석 하나가

기적처럼 면역세포를 움직이고, 회복력을 일으킨다.


감정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세포와 호르몬, 신경과 면역계를 이끄는 정교한 생물학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조 개의 세포와 나 아닌 것들의 정교한 공존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태계다.


장내 미생물, 피부의 모낭충, 고대 바이러스 유전자의 흔적까지.

이질적인 존재들과의 공존 없이는

‘나’라는 존재는 지속될 수 없다.


모든 문제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에서 시작된다.

균형이 유지될 때, 각 존재는 서로에게 이롭고

균형이 무너질 때, 생태계는 감염과 염증, 고립의 형태로 반응한다.


감정도 그렇다.

분노나 불안, 혐오 같은 감정들은 피해야 할 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안의 면역 반응이자, 경계의 재정비 요청이다.


이유를 묻고, 맥락을 살피고, 내 삶의 리듬과 맞춰 조율할 수 있다면

그 감정은 나를 소모시키는 에너지가 아니라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감정의 조율은 결국, 타인과의 공존으로 이어진다


내 감정을 이해하게 되면

어느 순간 타인의 감정도 ‘판단’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가 지금 내뱉은 날선 말이,

그녀가 무심히 건넨 표정이,

곧바로 나를 공격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조차 내 감정을 다루기 어려운 순간이 있듯,

그들 또한 불완전한 리듬 속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해란 용서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감정이 설명되지 않아도 조율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열리는 일이다.


공존이란 같은 속도로 걷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멀찍이 걷고, 때로는 걸음을 멈추며

서로의 리듬을 간섭하고 비켜가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반드시,

자기 감정과 먼저 화해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오늘도 나는 감정을 느낀다


감정이 흔들리면 면역도 약해지고,

면역이 무너지면 삶의 의욕조차 따라 무너진다.

그래서 이제 감정을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불안, 분노, 두려움, 기대…

그 감정들은 마치 모낭충처럼, 내 안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존재들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항상 함께였고,

때로는 나를 도왔으며,

무시할 때 더 날카로워졌다.


무력한 싸움은 멈춘다.

대신, 조율을 시도한다.

억제가 아닌 이해로, 차단이 아닌 관찰로.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며,

감정과 몸, 삶과 우주를 잇는

나만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리듬이다.


우주, 나, 모낭충.


서로 다르고, 때로는 불편하고,

하지만

결국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 존재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