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끝의 별빛처럼

by 노경문

찰리 커크의 암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한 젊은 정치 활동가가 연단 위에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은,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균열을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보수와 진보, 신앙과 세속, 자유와 억압이 부딪힌 끝은
결국 피와 죽음이었다.

극단은 언제나 폭력을 낳고, 폭력은 다시 극단을 낳는다.
만약 이 순환을 끊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존하는 체제가 아니라
증오를 제도화한 무대가 될 것이다.

나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의 확신은 거센 바람처럼 제도를 흔들었지만,
동시에 대화의 문을 닫아걸었다.

그는 국제정치를 거대한 협상 테이블로 바꾸었고,
그 위에는 인간의 존엄이 아니라 이익과 힘의 계산이 놓였다.
그 계산은 눈부신 햇빛 같았다.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지만, 오래 마주하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흐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국 우선주의’는 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자유무역과 보편주의의 이상은 무너지고, 각 국가는 생존을 위해 장벽을 세운다.

미국을 거부하던 이들조차 결국 미국과의 거래를 원한다.
중동의 분쟁, 우크라이나의 전쟁, 동아시아의 무역 협상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그 중심에는 다시 미국이 서 있다.

트럼프가 내세운 협상술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이 시대가 공유하는 생존 방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지점에서 세계와 한국의 과제는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진다.

이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반미 정서나 민족주의, 혹은 맹목적 사대주의는 모두 위험한 유혹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정치의 본질은 공동의 세계를 함께 보존하는 데 있다.
감정적 대립과 집단적 열광은 그 세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단순하다.
외교에서는 이익과 동맹의 균형을 잡고,
국내에서는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다.
경제와 안보,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껴안는 길만이 우리를 지켜낼 수 있다.

는 때때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이상 또한 가장 큰 허상일지 모른다고.
그러나 인간은 허상을 깨닫는 순간에도, 이상을 버리지 않고 되묻는 존재다.

우리는 더 나은 방향을 상상하지 않고는 살 수 없으며,
그 상상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허상에 속는 것이 아니라,
허상을 자각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찰리 커크의 죽음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극단의 언어와 폭력의 충동을 넘어,
더 나은 공동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가.
대한민국 역시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길을 찾는다면,
현실의 혼란은 오히려 성찰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 길은 강물과도 같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그 속에는 바다를 향한 끊임없는 흐름이 있다.
언젠가 뒤돌아보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되리라.
바로 그 길이 우리를 지켜낸 유일한 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묻는다.
사막의 끝에서 별빛을 올려다본 방랑자처럼,
우리는 이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스스로 선택한 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