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중소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 김독자는 자신이 읽었던 웹소설이 완결되는 날에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다 지하철이 멈추고 도깨비가 나타나는데 이 장면은 김독자가 정확히 알고 있는 웹소설의 초입부였다. 도깨비는 본보기로 사람을 죽인 후 지하철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 사람당 하나씩의 생명체를 죽이라는 미션을 준다. 지하철이 아비규환이 된 가운데 김독자는 웹소설의 등장인물중 하나인 곤충 덕후 이길영의 샘플들을 죽여 미션을 희생없이 클리어하게 된다.
이 웹소설의 주인공은 절대적 강자, 유중혁이었는데, 그는 사람이란 본디 악하고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는 지독한 회의주의에 빠진 회귀자였다. 유중혁과 김독자의 첫만남이 어긋난 이후, 원래는 유중혁의 동료가 되었어야 했을 동료들과 함께 미션을 클리어해 나간다.
극단적인 환경 속에 아노미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각자도생에 안주하며 이기적인 약육강식의 세상을 살고 있었지만 김독자의 동료들은 끝까지 힘을 합쳐 싸운다. 그러나 김독자는 본디 이런 성격이 아니었고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학창 시절 일진에게 강요받아 왕따들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그 왕따들 중 하나가 김독자였다. 다른 하나는 김독자에게 맞고는 수치심을 느껴 자살하고, 김독자는 자신이 그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이기주의에 빠진 웹소설 속 세상의 고독한 유중혁을 발견했고 이에 공감하며 오랜 기간 웹소설을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유중혁 혼자만 살아남는 결말을 보고는 오히려 김독자는 저런 결말을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댓글을 남긴다. 영화의 최종장에 유중혁이 죽자 그의 회귀 스킬로 현세계가 3분 안에 소멸할 위기에 처하지만 작가는 김독자에게 동료들의 도움과 SSS급의 무기를 주어 괴수를 물리쳐 미션을 클리어하고 세상을 구하도록 돕는다.
어찌보면 클리셰적인 왕도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쇼펜하우어 철학과 맞닿는 면이 있으며 이는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 쇼헨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나오듯 <전독시>의 세계는 직관적인 표상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의지에 움직이는 세게이다. 먼저 외적인 합목적성인 작가의 의도(원작의 결말)가 있고 김독자가 파악하는 이 세계의 내적 합목적성(김독자가 바꾼 결말)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결말을 아는 김독자는 근본적인 인과율의 예지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을 둘 다 지닌다. 물론 차이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최저단계까지 내려가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독시>에서는 의지의 원초적 작용, 생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며, 다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이 어떻게 대립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김독자의 내적 합목적성은 자신이 인식하는 표상이 더이상 ‘독자’ 혹은 ‘관조자’가 아닌 ‘주인공’으로서 의지를 실천함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어쨌든 판타지이다.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가 갑자기 세계의 구원자가 될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김독자 역시 평범하고 이기적이며, 두려움 많은 소시민이었다. 여기서 나는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어!’와 같은 유치한 성공신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 속에 고립되어 있지 않다. 각자에게 인식된 표상과 의지된 내적 합목적성은 상대적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관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공이 되어 세계 전체는 아니더라도 내 손이 닿는 세계만큼은 바꿀 의지와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진정한 생의 투쟁이다. 그리고 당신이 로봇이 아닌 한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싸움을 이어나간다. 죽을 때까지. 김독자가 말한대로 혼자 사는게 함께 죽는 것보다 끔찍하다면 우리에게 우리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타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