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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백 번과 "괜찮아" 한 번 사이에서

세탁기가 상영한 60분짜리 컬러볼쇼

by 엄마의 왈츠
아이의 여정을 지켜보며, 나는 나의 여정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설소대 수술, 조음장애, 아빠의 부재, 느린 발달...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우리 아이는 홈스쿨이라는 낯선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한 엄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나도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 존경합니다. 함께 힘내요!


우리 집 꼬마 실험가에게서 받았던 '엄마 설득 실험’ 목록이다.


●변기에 비누 투하 시 몇 초 만에 사라질지 관찰실험 (결과: 배관공 아저씨 호출..-_-)


●믹서기를 활용한 레고 블록 강도 측정하기

(결과: 믹서기 칼날 사망 및 AS 접수.. 쯧쯧)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옷장 속 거꾸로 매달리기 (결과: 엄마의 옷장 정리 노동 추가.. 아이고)


●책장 전면에 양면테이프 부착 시 접착력 테스트 (결과: 무심코 기댔던 엄마의 뒷머리카락 실종과 함께 찰진 욕 발사.. 이걸.. 확!)


●책꽂이 한 칸을 활용한 인체 구겨 넣기 마술

(결과: 엄마의 실시간 비명 발사)



상상이 되는가. 내 아들의 호기심은 육아서에 나오는 '물감놀이'나 '흙놀이'처럼 곱고 낭만적인 종류가 아니었다. 녀석은 나의 콩알만 한 허용범위를 정확히 겨냥해, 언제나 '괴물 발작' 버튼을 눌러버리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 수많은 실험 중, 딱 하루, 내가 'Yes!’를 말한 날이 각난다.




"엄마, 세탁기 안에 볼풀공들을 넣어서 돌려보고 싶어."




그날따라 날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포기할 만큼 내가 지쳤던 건지..... 머릿속에선 ‘호기심을 격려하는 이상적인 엄마’와 ‘AS 기사님을 호출하던 현실의 엄마’가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아이의 해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에라, 모르겠다. 망가지면 고치지, 뭐."



10분, 20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60분 내내 세탁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건 빨래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컬러볼 쇼’였다.



투명한 창 너머로 알록달록한 공들이 서로 부딪히고 튕겨 나가며 기묘한 춤을 췄다. 때로는 거대한 행성들의 충돌 같았고, 때로는 아름다운 색채의 교향곡 같았다.




나는 넋을 놓고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쇼를 바라봤다. ‘멍 때렸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가장 신기한 건, 정작 이 위대하고 기괴한 실험들을 했던 장본인은 그 순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안돼!"를 외치고 뒷목을 잡았던 내게만 그 순간이 빛나는 보물이 되었다는 것. 이건 정말이지,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그 괴상망측한 아이디어들을 조금 더 격려해 줄걸.

"여긴 너의 실험실이야!" 하고 집을 통째로 내어줄걸.




10년이 눈 깜빡할 사이가 될 줄 알았다면, 나는 아마 더 많은 ‘yes’를 외쳤을 것이다.




이제 십 대가 된 아들은 더는 세탁기에 공을 넣지 않는다. 대신 이어 버드를 끼고 현란한 요요 기술을 선보인다.



"엄마, 이건 젠트리스타인 콤보야!"




그 작은 손으로 세탁기 버튼을 누르던 녀석은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녀석의 실험 무대가 세탁기에서 세상으로 옮겨갔을 뿐, 그 기상천외함은 여전하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 최고의 관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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