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가 아닌, 설계로 세계를 잡을 수 있을까
문 앞에 선 삼성
밤새 돌아가는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생산 공장)의 불빛 아래, 사람들은 묵묵히 기계를 돌린다. 그들이 만든 반도체 속에는 수천 개의 나노 단위 회로가 새겨져 있지만, 그 회로를 '그린' 사람은 따로 있다.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파운드리 기업 중 하나다. 하지만 정작, 그 공장에서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사람은 삼성 바깥에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삼성이 '찍어내는 기술'을 넘어, '그리는 사람들'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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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의 힘은 '생산'에 있다
삼성은 오랜 시간 세계 최고의 생산기술을 쌓아왔다. EUV(극자외선 리소그래피, 회로를 그리는 첨단 광원 기술)를 활용한 3 나노(nm)급 공정, HBM(High Bandwidth Memory, 초고속 메모리) 시장 대응, AI 칩 패키징 기술까지—삼성의 생산 역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찍는 기술'만으로는 세계를 주도할 수 없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건,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먼저 정하는 쪽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설계(Design)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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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계'의 문은 기술보다 언어에 가깝다
설계는 단순한 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설계 언어'와 '설계 문화'가 뿌리내린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실제로 오늘날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는 건 설계 기반 기업들이다.
NVIDIA, Apple, Qualcomm… 이들은 칩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 대신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전자설계자동화툴)를 활용해 칩의 청사진을 그린다. 그들이 만든 설계도면은 TSMC나 삼성 같은 파운드리 기업이 대신 생산한다.
즉, 설계를 그리는 자가 방향을 정하고, 생산하는 자는 그에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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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성은 왜 설계의 중심에 서지 못했는가
설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EDA가 있다.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는 복잡한 반도체 회로를 컴퓨터 언어로 짜고 시뮬레이션하고, 검증해 주는 설계 전용 소프트웨어 툴이다.
이 EDA 시장은 사실상 미국이 독점하고 있다. Cadence, Synopsys, Siemens EDA… 세계 주요 설계자들은 이 툴에 의존해 설계를 시작하고, 그 언어에 맞춰 회로를 짠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삼성은 지금까지 EDA 툴을 '구매'해왔지, 만들지 않았다. 설계의 언어를 쓰지 않고, 설계자의 사고방식도 갖추지 못한 채, 고객의 도면을 받아 '찍어주는' 생산자에 머물러 있었다.
삼성의 자체 설계 역량은 어떨까? 엑시노스 프로세서, DRAM 설계 등 삼성도 분명 설계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자사 제품을 위한 설계'에 국한되어 있다. 진정한 설계 생태계 주도란, 외부 설계자들이 삼성의 플랫폼에서 자유롭게 창작하고, 그 결과물이 산업 표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삼성은 공장을 가졌고 일부 설계 역량도 있지만, 설계 문화와 커뮤니티를 주도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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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삼성은 어떻게 설계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삼성은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단순한 생산자를 넘어, 설계까지 주도하는 '플랫폼형 기업'으로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다른 이의 도면을 받아 찍는 역할에 머무를 것인가.
이를 위해선 세 가지 열쇠가 필요하다.
1) 오픈 플랫폼 전략
과거 삼성은 설계 생태계를 독자적으로 통제하려 했지만, 이제는 외부 설계자들과 호흡하는 개방형 전략이 요구된다. ARM과의 협업 한계가 드러난 지금, RISC-V(리스크파이브, 오픈소스 설계 아키텍처)나 내부 AI설계툴을 공개하는 전략이 설계자들을 끌어들이는 관문이 될 수 있다.
삼성이 단순히 RISC-V 칩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RISC-V 생태계의 **'설계 허브'**가 되는 것이다. 전 세계 스타트업과 설계자들이 삼성의 플랫폼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삼성은 그 과정에서 생산과 설계를 동시에 주도하게 된다.
2) 설계 언어에 익숙한 글로벌 인재 유치
설계는 '기술' 이전에 '문화'다. NVIDIA나 Apple의 설계 리더들은 EDA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설계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고 토론하는 감각을 공유한다.
삼성이 진짜 설계 기업이 되려면, 이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내부에 끌어들이고, 그들이 자랄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설계 문화를 한국으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만의 독특한 설계 철학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건이다.
3) 고객을 파트너로 삼는 설계-생산 연동 구조
TSMC는 단순한 생산자가 아니다. 고객과 긴밀히 협력하며, 설계 단계에서부터 기술적 제약을 미리 조율한다. 이를 'Co-optimization'이라고 부른다.
삼성도 고객과의 수직적 관계를 넘어, 설계 단계에서부터 나란히 걷는 '동반자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고객이 "이런 칩을 만들어달라"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삼성이 만든 칩'이 아니라, '삼성과 함께 설계한 칩'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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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는 자'가 방향을 결정한다
지금까지 삼성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한 공장을 만든 기업이었다. EUV 장비를 가장 먼저 도입하고, 3 나노 공정을 먼저 돌리고, HBM·패키징에서 AI 시대를 겨냥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공장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묻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질문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설계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감각과 철학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설계는 도면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그 상상을 먼저 떠올리는 이가, 다음 패권의 방향을 정한다. AI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단순히 연산 속도가 빠른 칩이 아니라, AI가 인간과 어떻게 상호작용할지, 어떤 가치를 실현할지를 먼저 상상하는 자가 승부를 가른다.
삼성은 지금 자신의 공장 안으로 그 '그리는 사람들'을 초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삼성은 다시 한번,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 열쇠는 더 이상 '더 작게, 더 빠르게, 더 많이'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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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삼성의 미래는 파운드리 기술의 완성도에 달려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설계 생태계의 중심에 서서, 전 세계 설계자들이 삼성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하는 플랫폼이 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 길이 열린다면, 삼성은 단순한 '제조업체'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