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브루탈리스트 > 심층 리뷰/해석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by 재용

“ 역사는 누구를 위한 기념인가,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0.24.16.png

#1 초반 줄거리


1-1 미국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가 미국 땅으로 넘어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려낸다. 그는 그의 땅에서 촉망받는 건축가였지만, 나치즘이 그의 건축 양식을 금지하면서 건축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랬을 때 배의 바깥으로 나가면서 보이는 풍경인 뒤집어진 자유의 여신상은 마치 그가 꿈꿨던 아메리칸드림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우리 관객에게 강렬하게 심어준다. 그렇게 미국으로 가게 된 라즐로 토스는 그의 사촌인 아틸라가 도움을 주어 가구점인 “Millers & Son”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그는 아틸라의 예전 고객인 자본가 ‘해리’의 주문인, 서프라이즈 선물로 그의 아버지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일을 맡게 되지만, 작업 중에 그의 아버지인 ‘밴 뷰런’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게 되고, 그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는 모습을 보고 라즐로와 아틸라를 쫓아낸다. 이 일 이후 아틸라는 라즐로를 찾아오게 되고, 그는 라즐로가 그의 아내를 탐냈고, 자신은 도움을 줬는데 일까지 망쳤다며 라즐로를 쫓아내게 된다. 라즐로는 해리의 작업이 성사된 이후 축하를 하며 아틸라와 그의 아내와 축하 자리를 보냈었고, 그의 아내와 춤을 추라는 아틸라의 말에 계속 거절하다가 어쩔 수 없이 춤을 추게 됐지만, 이에 아틸라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의 아내의 모함을 듣고 은인의 아내를 탐내고 일을 망친 한 파렴치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라즐로는 이러한 모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간다. 이에 훗날 라즐로는 그의 아내 엘리자벳에게, 그들은 그냥 내가 온 것이 싫었던 거라고 언급한다. 이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으로 찾아온 모든 이방인이 그곳에서 받는 시선이 어떠한지,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미국은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1-2 라즐로 토스는 어떤 인간인가?

그렇게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며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살던 라즐로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과거 그를 쫓아냈던 밴 뷰런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유는 그가 이전에 그의 아들 해리의 부탁으로 작업했던 서재가 엄청난 화재가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서재를 보유한 밴 뷰런의 안목과 감각에 대해 극찬하는 기사까지 나오게 되고, 궁금해진 밴 뷰런이 라즐로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재능이 있는 건축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라즐로를 그의 집으로 초대하게 된다. 이에 라즐로는 밴 뷰런의 집에서 성대한 환대를 받고, 그의 건축 감각과 재능에 대해 온갖 칭찬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밴 뷰런은 이야기한다. 나는 너에게 있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자본가)들은 너희 같은 재능 있는 사람들을 후원해 줄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예술가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다. 그리고 밴 뷰런은 라즐로에게 왜 하필 건축인가? 에 대해 묻자 라즐로는 답한다.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육면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예술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야기한다. “내 건축물은 전쟁을 견뎌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겁니다. 내 건축물은 어떤 침식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1-3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라즐로 토스는 죽어서 건축물을 남긴다.

라즐로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다. 그 역시 전쟁을 견뎌 살아남았다. 이는 그의 정체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나. 그랬을 때 라즐로는 그의 건축물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모든 예술가의 특징 같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세상에 그들의 작품을 남기고 싶어 한다. 사라지지 않을 그들의 작품. 그들의 육신이 사라져도, 다음 세대고 그다음 세대도 남아 있을 삶의 족적을 말이다 그리고 밴 뷰런은 자기 어머니와 자신의 유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돌아간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고 나서 밴 뷰런은 행사장에 와 있는 모든 이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이 장소에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딴 지역 주민 센터를 만들 것이라고. 그리고 그 건축을 라즐로에게 맡기고 싶다고 말이다. 그렇다, 그의 아메리칸드림이 마침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아내는 아직 유럽 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니까. 그러던 중 밴 뷰런에 의해 알게 된 그의 변호사가 라즐로 아내가 미국 땅으로 넘어올 수 있게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하고, 라즐로는 그의 아내 엘리자벳에게 편지를 쓰고, 아내에게 온 답장을 영화가 들려주면서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된다. 이 시간은 마치 아내가 없는 그의 시간이 얼마나 고됐음을 보여주는 듯, 영상엔 빛바랜 흑백 사진만 놓여 있고, 그렇게 인터미션 15분이 흐른다.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0.25.19.png

#2 중반 줄거리


2-1 살아남은 이들은 말이 없다.

그리고 시작된 2부엔 마침내 아내가 국경을 넘어 미국 땅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착한 아내는 휠체어를 타고 도착하게 되고, 이를 몰랐던 라즐로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다. 이에 대해 아내는 영양실조로 인한 골다공증이라고 말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초반 억울한 상황을 당했지만 말을 하지 않았던 라즐로의 상황과 이어진다. “왜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이는 곧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된다. 그렇게 아내와 그의 조카를 다시 맞이하게 된 라즐로는 본격적으로 밴 뷰런과 함께 건축 작업을 시작하는데 돌입한다. 아내와 함께 밴 뷰런과 만나고, 그 첫 식사 자리에서 밴 뷰런은 라즐로에게 모욕적인 농담을 건넨다. 그의 발음이 마치 구두닦이 같다며 동전을 던진 것이다. 이에 라즐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기지만, 엘리자벳은 모욕적이었다고 라즐로를 나무란다. 이 장면에서도 라즐로는 그의 모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가와 예술가가 서로 결탁하여 존재할 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2-2 자본에 의해 흘러가야만 하는 예술의 운명.

누가 갑인가? 당연히 자본가다. 왜 예술은 늘 자본에 의해 흘러갈 수밖에 없는가. 라즐로 토스는 예술을 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자본에 의해 흘러간다. 예술가들은 그저 존재하고자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세상에 남아 흘러가길 원하지만, 자본가들은 그들이 스스로 흐름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예술가들에게 잔혹(brutal)했고, 그 과정 속에서 토스의 건물은 브루탈리즘의 형식을 띠게 된다. 그런 토스는 브루탈리스트(ist)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인 토스가 잔혹한 일들을 겪는 장면들은 이제 펼쳐진다. 우선, 건축비 절감을 위해 다른 건설사를 불러들여 필요 없는 부분은 제외하고자 하는 밴 뷰런에 의해, 라즐로의 건축 계획은 계속 수정이 되게 된다. 심지어는 그 부분에 있어서, 라즐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품에서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비를 들여가면서까지 하고자 하고, 이는 또 다른 위기를 만들어낸다. 건축이 진행되는 내내 라즐로는 수모를 당하고, 계속 그 위기를 극복해 내려고 발버둥 친다. 그리고 이내,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건축 자재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인명 사고가 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밴 뷰런은 건축을 그만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라즐로는 하루아침에 잘리게 된다.


2-3 그들은 예술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 이후 밴 뷰런은 라즐로를 찾아와 다시 한번 일을 해보자고 제안한다. 이에 라즐로는 다시 일을 하게 되고, 예술이 자본에 의해 내팽개쳐지고 온갖 수모를 겪어도 결국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자본이 필요하기에 결국 또 자본의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예술의 숙명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렇게 밴 뷰런과 라즐로는 필요한 자재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채석장에 가게 된다. 그리고 자재를 받기로 이야기를 마친 뒤 라즐로와 밴 뷰런은 한 파티에 가게 된다. 여기서 라즐로는 술에 취해 낯선 여성과 일탈을 즐기게 되고, 밴 뷰런은 이를 위에서 가만히 쳐다본다. 지금까지 라즐로는 꾸준히 아편성 마약을 해 왔고, 초반 미국을 왔을 때는 아내가 있음에도 매춘부와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이렇듯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예술가인 토즈가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아님을 알리듯 그 모든 불완전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라즐로는 처음으로 관객들이 아닌 자본가인 밴 뷰런에 의해 그의 일탈 장면을 목격당하고 만다. 밴 뷰런은 그런 라즐로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나는 아마 배신감이라고 생각했다. 자본가가 바라보는 예술가란 그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더러우면 안 되는데, 라즐로는 그런 일탈을 밴 뷰런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후에 밴 뷰런은 라즐로를 ‘자신이 키우던 개’라고 언급한다. 이를 통해 라즐로는 ‘자신이 키우던 예술가’였고, 그래서 그가 키우던 예술가가 더럽혀지는 걸 목격한 자본가의 실망일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도 자본가와 예술가 사이에서 라즐로는 을이었고, 밴 뷰런에 의해 흘러갔지만, 그가 하고 싶은 예술에 있어서 밴 뷰런은 어느 정도 용인을 해 주며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라즐로는 완전히 밴 뷰런의 발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0.26.19.png

#3 후반 줄거리


3-1 돈으로 예술을 그들의 발아래에 두다.

이 시점에서 아마 밴 뷰런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지 않을까?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예술가, 그런 예술가를 돈으로 휘두르고는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보다 낫다는 구석이 있어서, 돈으로 모든 걸 해 오던 밴 뷰런에겐 일종의 열등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이후에 자신이 완전히 우위에 있고, 그래서 그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를 나타내듯, 그다음 장면에서 밴 뷰런은 라즐로를 강간하며 연신 외친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돈으로 지배할 수 없었던 유일한 것이 예술이라면, 이제 그조차도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밴 뷰런은 아무렇지 않게 라즐로에게 말을 걸고, 라즐로는 뭔가 표정이 석연치 않지만, 그럼에도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간다. 여전히 라즐로는 그가 당한 수모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이 이후에 그의 조카 역시 밴 뷰런의 아들인 해리에게 겁탈을 당한 것으로 나오나, 그의 조카 역시 이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3-2 돈은 예술을 강간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술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숙명.

우선 밴 뷰런이 라즐로를 강간한 장면에 대한 함의는 무엇일까? 예술은 지금까지 자본가에 의해 완전히 휘둘렸지만, 이제는 완전히 겁탈당했다. 돈은 예술을 강간한다. 예술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이는 화면을 담아내는 영화 예술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지 않던가. 영화는 하나의 산업이다. 하지만 예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자본을 추구해야 하고,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자본에 의해 살아남는다. 그래서 수많은 감독들은 자본에 의해, 대중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자본을 위한 작품을 만들며, 예술만을 쫓는 감독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배우 혹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들은 어떠한가? 민감한 이야기지만,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스폰을 하는 배우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누군가의 예술 세계 혹은 그러고 싶어 하는 열망은 늘 자본 아래에서 겁탈당하기도 한다. 영화 속 라즐로만이 아니라 현실의 예술가들도 같은 구조 속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라즐로 토스를 보라,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가 브루탈리즘의 형식을 한 채 우리에게 발가벗겨 보여주는 현실이다.


3-3 누구를 위한 외침인가.

이 일이 있은 후, 라즐로 토스는 굉장히 예민해지고, 병적으로 건축물을 완성하는 데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자신의 인권마저 유린당한 시점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예술뿐이다. 그렇기에 이 건축물을 완성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엄의 회복이자, 자신이 다시금 이 삶의 전쟁에서 살아갈 거처를 마련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 그의 아내 엘리자벳은 밴 뷰런의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밴 뷰런의 가족들과 손님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당신의 아빠는 강간범입니다.” 밴 뷰런이 라즐로 토스를 강간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도 직접적인 피해자인 라즐로는 침묵한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대신해서 그의 치욕과 고통에 대해 고발한다. 이에 밴 뷰런은 라즐로가 마약 중독자에 망가졌다고 그를 모함하며,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려하면 버려야 한다고 말하며, 그가 라즐로 토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결국 엘리자벳은 집에서 쫓겨나고, 라즐로는 영영 해고되며, 그가 건축물을 완성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 이후에 밴 뷰런은 사라지게 되고, 가족들이 그를 찾다가 라즐로가 짓던 건물 속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그 건물 천장에 있는 십자가를 거꾸로 비춰주며 영화의 2부는 끝나고, 에필로그로 넘어가게 된다.


3-4 그 모든 것들에서 브루탈리즘.

우리는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과연 라즐로는 엘리자벳이 그의 수모를 밴 뷰런에게 말하는 것을 원했을까? 그리고 밴 뷰런은 왜 사라진 걸까? 우선 전자의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은 “No”이다. 그의 인권마저 유린당한 지금, 라즐로가 이를 회복할 유일한 수단은 그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엘리자벳이 이를 말함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그는 영영 그의 작품을 완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라즐로에게 더 큰 불행으로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를 고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떨까. 밴 뷰런의 강간 장면 역시 우리 관객들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에 의해 이 역시 그의 가족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즉, 밴 뷰런이 라즐로의 일탈을 목격했던 것처럼, 밴 뷰런의 일탈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 셈이다. 밴 뷰런은 라즐로의 더러움을 목격했을 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고, 그때 자기가 느꼈던 감정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우월감. 결국 자신이 낫다는 그 감각. 하지만 그의 수치 역시 가족들에게 까발려짐으로써, 돈으로 모든 걸 해 왔던 사람, 자신에 대한 우월과 타인보다 월등하다는 생각을 평생 가져온 그에게 그 순간은 사형선고였을 것이다. 어쩌면 목숨보다 더 중요했을 정도로. 그래서 영화는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예술가와 자본가, 그 추악함을 모두 밝혀낸 뒤 자본가마저 끌어내림으로써, 십자가를 거꾸로 매달은 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자본이 신 같았나? 사실 신은 없다.” 우리가 믿는 자본이라는 신이, 미국이라는 아메리칸드림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며 그것을 냉소한다. 그랬을 때 ‘브루탈리스트’라는 말은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인 ‘브래디 코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저 부푼 생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0.27.06.png

#4 에필로그


4-1 누구를 위한 기념인가.

이제 이 영화의 에필로그가 나온다. 에필로그는 꽤 시간이 흐른 후를 보여준다. 이 장면 속 라즐로 토스는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채로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건축가로, 그의 전시 현장에 등장하고, 그의 휠체어를 끌고 있는 그의 조카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연설 현장에서 조카는 이야기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이 유대인들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라즐로가 밴 뷰런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지역 센터도 사실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 시절 갇혀 있던 수용소를 형상화했으며, 그런 우리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했다고 말이다. 그의 조카는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그렇기에 약속의 땅인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당시, 그의 아내 엘리자벳과 라즐로는 이에 대해 꼭 그곳으로 가야만 유대인이 아니라며, 여기 있는 모두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은 어느 곳에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조카가 시오니스트적인 성향을 띠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당사자가 아닌, 라즐로의 건축에 대해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건축물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라즐로는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이는 그의 건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거나, 그의 건축물이 민족적인 어떤 ‘상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의 조카는 그의 건물이 유대인을 위한 건물이었다고 말하며 시오니즘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4-2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라즐로 토스이다. 초반 영화가 시작했을 때, 그의 아내 엘리자벳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의 내용은 명백한 시오니즘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라즐로가 했는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건물이 유대인을 위한 건물이었다고 라즐로가 이야기하는가? 아니다. 그랬을 때, 나는 적어도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라즐로를 통해 전하려는 말이라면,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무분별한 혹은 강경한 시오니스트들을 비판하는 태도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즐로의 대사는 브루탈리즘적인 태도가 아니던가. 그의 건축은 마치 감정 없이, 설명 없이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는 그저 정육면체를 설명하기 위해 정육면체를 만들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저 머물면서 예술을 하고 싶던 예술가였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기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억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기억이 당사자를 위한 것인지, 혹은 남겨진 자들의 위안과 해석을 위한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이 특정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세는 이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결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이때,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이 모든 기억과 해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침묵했다. 그들에게는 말을 할 수 없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들은 그저 견뎠다. 말하는 것이 더 큰 고통이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침묵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침묵 속에서 ‘기억’은 타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자들이 등장했다.


4-3 역사는 누구를 위해 쓰이는가.

엘리자벳은 라즐로를 위해 그를 대신해 고발했고 조카는 라즐로의 건축을 해석했다. 그리고 역사는 후세에 의해 쓰였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과연 그것이 온전히 ‘당사자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후세가 그들의 아픔을 소비하는 방식인가? 안네 프랑크의 집을 보자.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얻는가? 애도의 감정? 역사적 반성? 아니면 단순한 관람의 경험? 기념은 언제나 후세를 위한 것이다. 당사자는 기념을 원했을까?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물이 ‘유대인의 아픔을 담은 건축’이라는 해석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저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을까? 결국, 기억을 남기는 것은 늘 후세의 몫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왜, 어떻게, 누구를 위해 남겨지는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이 기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즐로의 침묵은, 그리고 생존자들의 침묵은, 이 질문 앞에서 더욱 깊어진다. 그랬을 때 이 영화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시오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조카의 주장에 대한 라즐로 토스의 대답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라면 말이다. 이 영화의 주연은 라즐로 토스이지만, 이 영화가 라즐로 토스에 의해서 흘러가는가? 아니다. 이 영화를 흘러가게 하는 건 밴 뷰런이다. 시대가 흘러가게 만드는 건 자본이지 예술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예술에 대해 떠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 그림을 그린 당사자인가? 후세 아니던가. 예술이란 결국 라즐로 토스처럼 시대에 떠밀려 흘러가고, 후세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스크린샷 2025-05-20 오전 10.27.45.png

#5 글을 마치며


5-1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라즐로 토스는 이야기했다. “내 건축물은 전쟁을 견뎌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겁니다. 내 건축물은 어떤 침식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건물은 후세가 기념비적인 건물로 삼고, 역사로 남겨뒀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전쟁은? 그들은 그 전쟁을 견뎌 살아남고 앞으로도 세대를 넘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우리 세대의 전쟁을 보라. 고향을 찾겠다던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사상을 내세우며(물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단순히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며 땅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시오니즘이 이 분쟁의 뿌리 중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팔레스타인을 학살하고 있고, 가자지구 공습을 통해 2만 명 이상 사망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다. 그랬을 때, 이 영화가 시오니즘을 내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냉소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스탠스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의 아픔이 다른 이들에 의해 발화되고 그들의 잔해들이 후세에 의해 기념비적인 명목으로 남게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가. 조나단 글레이저는 그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아카데미 장편 영화 부문 국제영화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이야기한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그때 그들이 한 일을 보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고 말하기 위해, 현재를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형성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의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갈등을 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입장의 반대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10월 7일 이스라엘의 희생자든, 현재 진행 중인 가자지구 공격의 희생자든, 모두가 이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인데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요?”


5-2 다음 세대를 살아가게 만드는 일.

이 연설은 시오니스트의 입장도, 반시오니스트의 입장도 아닌, 그저 사람에 의해 사람이 죽는 일이 “비인간화”의 희생이므로 이에 대해 저항하자는 것이며, 그의 영화는 ‘그때 그들이 한 일을 보라’가 아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랬을 때 나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그런 입장이 이 영화를 다루는 브레디 코베의 입장과도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를 만들어내고, 수많은 역사적 희생이 이루어진 장소들을 기념비적 장소로 삼으며, 그것들로 역사를 쓴다. 이 역사는 누구를 위한 기념이고, 그들의 희생은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적어도 우리의 돈벌이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우리의 먼 나라 땅에선 여전히 새로운 형태의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금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건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을 기념비로 세우고, 역사에 남기려는 건 늘 후세이다.


이 영화가 시오니즘을 옹호하는지, 혹은 옹호하지 않는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그 사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라즐로 토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지금 전쟁을 겪는 일들을 그대로 바라보고,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다음 세대에도 살아갈 수 있게 집중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늘 떠드는 건 산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가 치르는 기념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희생을 기념하고, 그것을 역사로 남긴다. 하지만 이 역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희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봐야 하는가. 적어도 나는 이 영화가 그 중심을 지키며, 지금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게, 라즐로 토스의 우여곡절 끝에도 완성해내지 못하고, 후세에 의해 유대인을 위한 건물로 남았지만 이를 부정했던 라즐로 토스의 그 건물이 쓸쓸하게 먼 땅 위에 브루탈리즘 건축의 양식으로 굳건히 서 있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게 기념비적인 영화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 영화는 누구를 위한 기념인지 우리에게 자문한다.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과거의 희생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희생을 막는 일이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