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문 틈에서> 제13장. 이기적인 사랑 For Doing
창밖의 나뭇잎들은 바람에 무겁게 한바탕 흔들리다 멈추어 섰다.
장마철의 흐릿한 하늘.
짓누르는 듯한 공기의 무게를 나무는 온몸으로 견디어 내고 있었다.
하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엄마가 해주는 게… 솔직히, 이제 좀 지겨워요.”
하진의 목소리는 까칠했다.
“밥 차려주고, 반찬 덜어주고, 안 먹으면 화내고요. 아침엔 커튼 확 열고, ‘일어나! 몇 시야 지금?’ 소리치고. 머리 감고 씻고 나오면, ‘물 떨어지잖아!’라면서 수건 들고 따라오고….”
하진의 눈꺼풀이 떨렸다.
“친구 만난다고 하면 또 난리 나요. 득도 없는 애들하고만 논다고. 그러면서 절 사랑한다는 그 말, 되게 만능 카드 같지 않아요?”
하진은 영애를 향해 시선을 멈췄다.
“사랑하면 뭐든 해도 되나요? 화내고 감시해도 되고, 사생활 침해해도 되요? 저도 엄마한테 막 하고 사랑해서 그랬다고 한마디 하면 되겠네요?”
하진은 잠깐 눈을 피했다가, 조심스레 영애를 바라봤다.
“사랑이 너무 숨 막혀서요.”
영애는 한 손으로 컵을 잡으며 말했다.
“하진아, 엄마가 널 돌보는 그 사랑이, 네 자유를 제한하는 것 같구나?”
“네. 다 절 위해서라는 말도 억울해요. 저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 제가 자꾸 빚쟁이가 되잖아요. 제게 죄책감을 들게 해서 저를 통제하려고….”
영애는 그 말에서 누군가를 통제하지 않겠다는 하진의 각오를 엿보았다.
하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줘.’ 그런 거래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싫은 거네? 대가를 바라는 그 마음이?”
하진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네. 사랑이면, 계산서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계산서 없이 받은 선물엔… 오히려 보답하고 싶잖아요.”
영애는 하진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부부관계에서 발생하는 부모의 미해결 감정은 아이에게 전달된다.
애착은 어느새 집착으로 변한다.
그 무게를 짊어진 하진.
“엄마는 맨날 엄마 속상한 것만 말하고 제가 원하는 건 묻지 않아요.”
하진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듯 말했다.
“저를 사랑한다면 엄마 아빠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옛날 비행기 쇼 보러 갔을 때처럼요. 제가 바라는 건 단지…. 엄마 아빠가 웃는 모습이에요.”
영애의 목소리는 느리고 낮았다.
“그렇구나. 엄마가 그렇게까지 널 돌보려면 힘들 텐데, 왜 그러실까?”
“아마… 엄마 안심하려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제가 안 될까 봐? 불안해서? 그러니까… 엄마 불안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 아녜요?”
삼키기 어려워 물고 있던 말을 뱉어버린 듯, 하진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영애도 목으로 당겼던 두 어깨를 아래로 풀어놓았다.
“맞아. 원래 그렇긴 하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한 행동도 사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한 선택이지.”
하진은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는 불안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저는 자유로워지려고 그 사랑을 거부해요.”
하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형은 안 그런데 저만 그렇다면, 정말 제가 별난 걸까요?”
하진은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엄마를 변호하고 있었다.
거부와 수용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
그게 청소년기다.
“청소년기에는 주도성과 자립심이 커지니까. 이제는 Leave가 필요한 시기이지.”
영애의 말에 하진은 간절하게 말했다.
“Leave요…. 제발 좀.”
영애는 덧붙였다.
“아기 때는 부모의 돌봄에 의존하니까 For Doing이 전적으로 필요해. 하지만 커 갈수록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볼 수 있어야겠지? 부모가 다 해주면, 언제 그런 연습을 해봐?”
하진은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제가 커 가면서 점점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나 봐요.”
영애는 끄덕였다.
“맞아. 자존감은 자기 몸을 자기 힘으로 돌 보는 능력에 따라오는 마음이거든.”
잠시 침묵하고 영애가 말했다.
“네 ‘좋은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누구야?”
하진은 영애의 눈을 살며시 마주쳤다.
“사람만요? 음. 친구. 할머니, 상담 선생님, 그리고 엄마 아빠도 조금은요.”
“그렇구나. 좋은 세계 안에 부모나 소중한 사람이 있는 건 엄청 중요하지. 하지만 자기 모습이 있는 건 더 중요해. ‘자신을 돌보는 자기’ 말이야.
”나를 돌보는 나“
영애의 말을 따라 하는 하진을 보며 영애는 다시 물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나를 돌보아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내 ‘좋은 세계’에서 빠져 버리는 날이 오면, 그럴 때, 너는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하진은 눈을 떨구었다가 천천히 들었다.
“아! 난 이제 못 살겠구나.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겠구나.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극단적인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그러니? 그래서 그래. ‘좋은 세계’ 안에 ‘자신을 돌보는 자기가 있어야, 이럴 때조차도 버틸 힘이 생기거든. 내가 나를 돌볼 수 있도록.”
잠시 생각하던 하진이 물었다.
“그럼 어릴 때부터 Leave만 하면요?”
“그럴 땐 아이가 너무 일찍 자립하겠지?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내 힘만으로 살았으니까 ‘좋은 세계’ 안에 고마운 사람이 없겠네요.”
“그렇지? 남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유대감을 못 느끼니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겠지? 독불장군처럼.”
영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상담실 창밖의 나뭇가지가 세찬 바람에 흔들렸다.
하지만 큰 줄기는 미동도 없었다.
하진이 물었다.
”자신도 책임지고, 남도 신뢰하고. 둘 다 필요한 거 아녜요?”
영애는 작게 웃었다.
“맞아. 그런데 돌봄은 신체적 돌봄과 심리적 돌봄이 있겠지? 아기가 커 가면서 신체적 돌봄은 점점 줄어들지만, 심리적 돌봄은 계속 필요하겠지?”
이제야 하진은 편히 숨을 내쉬었다.
”아, 그거, Caring Habits이요?”
“맞아. 그러면 ‘좋은 세계’ 안 엔 자신의 그림과 타인의 그림이 함께 들어 있게 되겠지?”
하진의 눈은 빛났다.
“그러면, 자존감도 올라가고, 사람들과 유대감도 갖고요?”
하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요, 선생님. For Doing이랑 Leave가 적절한지 어떻게 알아요?”
영애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게 어렵지. 집마다 사정이 다르거든. 맞벌이면 일찍 독립시키고, 전업이면 더 챙기게 되니까.”
하진이 손을 저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요? 스스로 못하면 Leave를 늘리고, 너무 혼자 다 하면 For Doing을 늘리고….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하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게요….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그렇지. 누구나 사랑을 배워가는 중일걸?”
잠시 침묵 후 영애는 말했다.
“어릴 땐 꼭 필요했던 돌봄인데. 아이가 컸다고, 이걸 놓아버린다는 건 어려울 거야. 엄마도, 자녀의 성장만큼 내적으로 자라야 하는데….”
그 말에 하진의 눈이 빛났다.
“선생님, 제가 엄마랑 안 좋은 게… 혹시, 엄마가 변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녜요?”
영애가 소리 내어 웃자 하진도 따라 웃었다.
“엄마는 왜 놓지 못할까요? 제가 싫다는 데도요?”
“나 스스로 내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
영애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하진도 따라가며 낮게 읊조렸다.
“엄마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모르니까. 그래서 나에게 집착을 놓기가 어려운 거네요.”
어느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나 보다.
빗물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의 도움은 혹시 당신의 유능 감을 느끼고 싶어서일 때가 있나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니 받을 게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나요?
당신의 도움을 타인이 원하지 않을 때는, 당신의 도움 또한 이기적인 행위이겠지요?
※부모의 행동 유형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행동 유형은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For Doing: 자녀의 돌보는 행동이다.
주로 자녀의 신체를 돌보거나 물질적인 것에 해당할 때가 많다.
자녀가 아주 어릴 때 부모가 하는 행동은 거의 For Doing에 해당한다.
이 경우 부모는 주로 힘 욕구가 충족되지만, 자녀는 주로 힘 욕구가 좌절된다.
To Doing: 자녀를 가르치는 행동이다.
자녀가 조금만 커도 부모는 가르치며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이 경우 부모는 주로 힘 욕구가 충족되지만, 자녀는 거의 모든 욕구가 좌절된다.
With Doing: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이다.
이때 자녀와 부모의 욕구 모두가 충족된다.
자녀가 성장해서도 이런 행동이 많다면 관계가 좋다고 할 수 있다.
Leave Doing: 부모는 자녀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고 자녀에게 맡기는 행동이다.
이는 자녀를 믿어주는 행동이기도 하다.
부모가 내적 통제력이 부족하면 자녀를 믿고 내버려 두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