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문 틈에서> 제14장. 자극과 정보
상담실 문을 닫으며 하진이 숨을 헐떡였다.
“선생님, 혹시 엄마한테서 전화 안 왔어요?”
“아니, 왜?”
영애가 놀라 다가갔다.
하진은 가방을 맨 채 서 있었다.
“엄마가 선생님한테 직접 전화한댔는데…. 상담받고 나서 제가 더 나빠졌다고. 어제 아침에 대판 싸웠거든요.”
영애는 하진을 데리고 앉았다.
“엄마가 도서관이라도 가라면서 절 깨웠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씨!’ 하고 돌아누웠거든요. 그랬더니 엄마가 당장 밥 먹으라면서 잔소리를 시작했어요. 그래서요… 반찬을 무심하게 툭 쳐서 떨어뜨렸어요. 재빨리 깨지지 않는 그릇만 골라서요.”
영애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오니까, 엄마가 저를 보고 웃으며 제 티셔츠를 가위로 자르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식탁 한쪽을 들었다 놨어요. 반찬 몇 개가 쏟아지고, 엄마는 소리 지르고, 손에 가위를 든 채로 저를 쫓아오고… 그렇게 된 거예요.”
말을 마친 하진은 숨을 몰아쉬었다.
영애는 조용히 웃었지만,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부모보다 아이의 삶에 더 애정을 쏟는 존재가 있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게 될까?
하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해요. ‘네가 나를 미치게 만들잖아.’라고요. 근데… 전 그 말이 너무 억울해요. 그 말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엄마 목소리는… 너무 날카로워서 머릿속을 찔러요. 반찬 접시가 떨어질 때 나는 그 소리처럼요. 사실…”
하진의 말에 상담실이 순간 멈춘 듯했다.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 속에 먼지들이 어슬렁거렸다.
“전 형편없는 놈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요? 엄마도 그러는데….”
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애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진아. 엄마 말을 어떻게 생각해? 네가 엄마를 미치게 했다는 거.”
하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영애를 바라봤다.
마치 질문 뒤에 숨은 의도를 읽으려는 사람처럼.
“저 때문에 엄마가 미칠 것 같다는 거요? 엄마가 화낼 때 정말 조금 미친 것 같긴 해요.”
영애는 살짝 웃었다.
“네가 엄마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네가 엄마를 미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진은 자신 없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요.”
영애는 여전히 미소 지으며 하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 정말 그럴까?”
영애는 하진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하진아, 게임 시간이 넘으면 미치는 엄마도 있고, 웃고 넘기는 엄마도 있잖아?”
“진짜 그런 엄마도 있어요?”
“있지. 우리 딸도 예전에 화장한다고 몰래 립스틱 바른 적 있어. 그땐 어린 게 뭘 벌써 하냐고 혼냈거든.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가서 예쁘게 고쳐줘. 봐 봐. 내가 다르게 행동하지?”
하진은 열린 입을 닫지 못했다.
“선생님이 딸 화장을 고쳐줘요?”
영애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예전하고는 내 행동이 많이 달라졌거든. 예전에는 내가 반응한 거라면, 지금은 내가 선택을 한 거지.”
영애는 창밖 멀리 도로 쪽을 보다가 다시 말했다.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 넌 항상 멈춰?”
“대로에선 멈추지만, 골목에선 차 없으면 그냥 건너요.”
“그렇지? 빨간 불은 그냥 정보라면? 차가 지나간다는 정보. 길을 건널지 말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겠지?”
눈을 끔뻑거리는 하진에게 영애는 다시 물었다.
“전화 받는 건 또 어떨까?”
“그럼, 전화도 마찬가지예요?”
“그렇지. 너는 모든 전화를 다 받니?”
“아뇨. 광고 전화 같으면 안 받아요.”
“그렇구나. 전화벨은 누군가 널 찾는다는 정보겠지? 받을지 말지는 네가 선택하는 거고. 전화를 무조건 받는다면 너는 아마 자동응답기일걸? 사람은 선택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진의 눈이 흔들리더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근데 엄마는 항상 그래요. 제가 엄마를 미치게 만든다는 거예요. 말이 안 되죠? 그죠? 제가 게임 하는 것. 엄마 말을 씹는 것. 맨날 그놈의 캔버스화만 신는 것. 내 방에서 문 잠그고 있는 것. 모두 정보 아닌가요? 그럼 엄마가 미치지 않고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도 있을 텐데요. 제가 조금 잘못했더라도, 그건 정보이니까요.”
영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면 참 좋았겠지.”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하진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영애는 시계를 보고 놀라 물었다.
“가려고?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하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상담받아야 할 사람은 엄마예요. 엄마가 제 행동을 정보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저를 조금은 다르게 대할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처럼요.”
하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왜 맨날 저만 노력해야 해요? 엄마는 맨날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앞으론 상담 안 올 거예요. 대신 엄마가 오든지 말든지….”
바닥 위의 스니커즈 운동화가 그림처럼 고요했다.
영애는 순간 따라 일어서려다, 숨을 들이마시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맞아. 네 말이…. 엄마가 상담도 받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엄마도 더 멋진 사람이 되겠지. 근데 네가 아는 네 엄마는… 어떨 것 같아?”
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엔 그런 사람도 많더라. 자기가 성숙해지면 손해 본다고 여기는…. 옆 사람이 덕 본다고 여겨서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어제처럼 작년처럼, 어릴 때처럼,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해.”
영애는 하진의 뒤에 대고 물었다.
“하진아, 너는 어느 쪽이야? 네가 성장하는 쪽? 아니면 남이 성장하는 쪽?”
막 걸음을 떼려던 하진이 멈춰 섰다.
“어때? 엄마는 변할까? 언제나처럼 엄마가 그대로이면, 너는 어떨 것 같아?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
에어컨 소리만 흐르는 방.
하진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영애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하진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갑자기 할머니가 생각났어요.”
영애가 하진을 바라봤다.
“유치원 하원 차에서 내리면 언제나 할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어요. 그때마다 “할머니 미워! 저리 가!”라고 소리치면, 할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우리 착한 하진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할머니를 서운하게 하고 싶지는 않을걸?’”
하진은 영애를 흘깃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소리쳤어요. ‘할머니가 없으면 엄마가 나올 거잖아!’ 그때 할머니는 껄껄 웃으며 저를 꼭 안아주셨거든요. 그때 할머니는 제 말을 자극이 아니라 정보로 들으셨을까요? 엄마를 보고 싶다는 정보로?”
등을 기댄 채 말하던 하진은 허리를 펴 바로 앉았다.
“엄마가 미치겠다는 말… 그걸 제가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엄마의 말은 제게 늘 자극이어서 언제나 제 마음을 찔러서요.”
영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엄마의 그 말도, 그냥 속상하다는 정보일 뿐일지도 모르지.”
그 순간, 숨이 트였다.
“저는 그동안 엄마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믿었어요. 절 따뜻하게 대해줬다면, 제가 달라졌을 거라고요.”
영애는 조용히 물었다.
“그랬구나. 너는 어떻게 살고 싶은데?”
하진은 시선을 떨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도…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학교도 잘 다니고 싶어요. 남의 물건에 손도 대기 싫고요.”
영애는 미소 지었다.
“부모의 말이 자극이 아니라 정보라면 말이야… . 너는 이제,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니?”
* * *
상담실을 나가는 하진.
아직은 해가 밝았다.
그런데 하진은 깜깜한 굴속을 걸어가는 듯했다.
그리고 저 먼 곳에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자극에 휘둘리며, 자동응답기처럼 살았던 날들.
이제는 알 것 같다.
정보는 그저 정보일 뿐,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내 몫이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진짜 사람’이라고 느꼈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당신은 지금, 자극에 반응하고 있나요?
아니면 정보를 참고하여 당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있나요?
※자극과 정보
자극과 정보는 나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행동, 말, 상황, 사건을 말한다.
이런 것들을 자극으로 받아들이면 습관화되어있는 자동화된 반응을 하게 되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고, 그때의 자기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정보로 받아들이면, 이 정보를 해석해서 자기에게 도움 되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어서, 자기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근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