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바꾸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3부 <문 안에서> 제16장. 현실치료(Reality Therapy)

by 박광석

상담실 문이 열리자, 깨끗한 캔버스 스니커즈가 햇살을 밟았다.

하진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상담실을 한 바퀴 둘러보다 벽에 붙은 자료에 다가가 보기도 했다.

‘행복’엔 웃고 있는 두 사람.

‘쾌락’엔 술잔과 스마트폰.

영애는 자료를 챙기다 그 모습을 지켜봤다.

움직임이 늘고, 시선이 머무는 곳이 많아졌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하진아.”

영애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하진도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 손을 입에 모은 채 물었다.

“선생님, 제가… 뭘 좀, 다르게 해볼 수 있을까요? 지난주에 말한 Force요. 집에서 생각해봤거든요. 제가 그랬잖아요? 참고 있다가 폭발하고. 학교도 안 가고. 방에만 있고…. 근데 이제는….”

하진은 눈을 들었다.

“이젠 Power를 갖고 싶어서요.”

어깨를 으쓱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Power라고? 멋있는데!”

영애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근데 그게… 제가 원한다고 될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이 화목했으면 좋겠고,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만 쳐다보지 말고…”

“그러면 정말 좋겠다. 그렇지? 근데… 그게 네가 노력한다고만 되는 걸까?”

하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애는 팔을 뻗어 옆 테이블 위의 책에 눈과 손을 얻으며 말했다.

현실치료는 말이야, 현실 안에서, 현실적인 방법으로 욕구를 채우라고 하거든.”

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실치료요? 그게 뭐예요?”

영애는 빙그레 웃었다.

“하진아, 너희 아버지는 어떤 분이야?”

하진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화나 있거나, 무시하거나. 아니면 소리 지르거나.”

“어머니는?”

하진이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저만 보고 있어요. 숨도 못 쉬게.”

“두 분 사이 관계는?”

하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싸우거나, 말 없거나.”

“경제적 여건은 어때?”

“딱히 힘든 건 아닌데요.”

“부모님이 너에게 바라는 건 뭐야?”

하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형처럼 되는 것….”

“그 요구 중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을까?”

하진은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형처럼은 싫고요. 학교는… 아직은 아니지만….”

영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하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하지만… 친구 중에는 엄마랑 장난치는 애도 있고, 아빠가 엄청 다정한 애도 있어요. 걔넨 같이 영화도 보던데…”

영애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구나. 그 아이에겐 ‘현실’인데, 너에겐 ‘현실’이 아니구나. 안타깝지만, 어쩌니? 각자 자신의 현실 속에서 욕구를 충족해야 하니….”

영애는 하진의 얼굴에서 막 피어오르던 기운이 꺼지는 걸 보았다.

눈빛 속에 억울함이 번졌다.

‘왜 나만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선생님, 공평하지 못해요!”

영애는 담담하게 말했다.

“맞아, 우리의 현실은 공평하지 못하지.”

그 말에 하진은 더 격해졌다.

“그걸 그냥 받아들이라고요? 왜 저는… 왜 우리 집은! 왜 제가 참고, 바꾸고, 노력해야 해요?”

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하진이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그런데도 제가 현실 속에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해요?”

영애는 목소리를 낮춘 채 담담하게 말했다.

“하진아, 만약 누군가 그 현실을 바꿔준다면 참 좋겠지.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어?”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영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조차 선택할 게 있다는 건, 어때?”

하진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결국… 저밖에 없네요. 제가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바뀌니까.”

영애는 미소 지었다.

“그게 억울할 수도 있지만… 가장 희망적인 말이기도 할걸?”

하진은 중얼거렸다.

“아직도 좀 억울해요.”

영애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딴 나라에서는 군대 안 가는데 우리는 가잖아?”

하진을 흘깃 본 뒤 덧붙였다.

“법과 규칙을 지켜야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하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야 대가를 안 치르니까요?”

영애는 눈을 찡긋하며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물 두 컵을 가져왔다.

하나는 하진 앞에, 하나는 자신 앞에.

그리곤 물을 씹듯 천천히 머금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하진은 물었다.

“그럼… 현실적인 방법으로라는 게 뭐예요?”

“현실적인 방법 말이지? 으음…. 그게 말이지….”

영애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빛이 반짝였다.

“노력은 안 하고 시험을 잘 보고 싶은 것, 음식 조절을 하지 않고 살이 빠지길 바라는 것.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바랄 수는 있잖아요. 저도 가끔 그래요.”

영애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예상 문제를 이미 풀어 본 사람처럼.

“맞아. 그렇긴 해.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아!”

하진의 눈이 커졌다.

“운에 맡겨야 해서요?”

영애는 웃으며 말했다.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있으면, 언젠가 감이 입속으로 똑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잖아요.”

“아! 선생님!”

하진은 무언가 떠오른 듯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현실적인… 방법요. 현실적인 방법은,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걸 말하는 거죠?”

영애는 자신의 물컵을 들어 ‘짠!’하며 하진의 물컵에 갖다 대었다.


“도둑놈 심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도둑놈 심보가 왜?”

놀리듯 묻는 영애의 표정에 하진은 말끝을 흐렸다.

“제가요… 지금까지 바라는 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지금 보니….”

영애는 침묵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동안 하진이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치료이니까.

욕구가 충족될 때 생명력은 저절로 살아나니까.

영애는 하진의 어깨를 살짝 토닥였다.

자책하지 말라는, 기특하다는 뜻이었다.

하진은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하는 게 현실치료예요?”

“응. 선생님은 현실치료를 공부했어. 왜? 궁금해? 현실치료가 뭔지?”

“아니요. 처음 듣는 말이라서요. 엄마 방 자격증엔 그런 말은 없던데…. 선생님은 어떻게 배우게 되셨어요?”

영애는 놀랐다.

지금까지 자기 이야기만 하던 하진이, 이젠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변화가 반가웠다.

“무슨 계기가 있었어요?”

하진이 재촉하자, 영애는 미소를 지었다.

“그게 말이지.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잖아? 살던 대로는, 안 되더라고.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았지. 그때 알았어.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바꾸려 들 때라는 걸. 특히 가족 말이야.”


하진은 유난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선생님도 그런 적 있어요?”

대답 대신 빙그레 웃는 영애에게 하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현실치료는, 현실을 바꾸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바꿀까?”

영애가 되묻자 하진이 눈을 끔뻑였다.

“우리의 삶이 달라지려면, 무엇인가는 바꿔야 하지 않겠어?”

하진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현실 말고… 제 행동?”

하진의 표정은 밝았다.

지겹게 들었을 ‘행동을 바꾸라.’는 그 말이, 오늘은 하진에게 희망으로 닿은 듯했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바람’이 하진에게 작은 불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진이 영애를 바라보았다.

영애도 미소로 답했다.

둘은 나란히 웃었다.

영애는 보았다.

하진의 얼굴에 퍼진 어둠을 밀어내는 따스한 빛을.

살던 대로가 아닌 새롭게 산다는 것.

이것은 ‘상식’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문득 하진의 엄마 얼굴을 그려봤다.

※독자에게 드리는 질문

지금,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바람은 당신이 노력한다면, 당신의 현실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혹시 아무 노력 없이 얻기를 바라거나,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요?


※현실치료

현실치료는 윌리엄 글라써(William Glasser) 박사가 창안한 상담 기법이다.

현실치료는 인간이 행동을 선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선택이론(Choice Theory)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더 나은 행동을 선택하도록 안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현실치료는 과거의 상처나 미래의 불안에 집착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욕구를 충족하는 현실적인 방법을 찾도록 돕는다.

불행한 사람들은 공상 속의 인물 같은 비현실적 대상을 통해 욕구를 충족하려 하거나, 법과 규칙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교도소, 정신병원, 사회적 고립 등 현실과 괴리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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