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정리를 반복하며, 삶의 본질에 가까워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른 번에 가까운 이사를 했다.
삶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렀다.
부모님의 사업, 유학생활, 해외 근무,
승무원 생활, 베이스 변경 등 (외항사 승무원의 베이스는 대부분 본사 현지이며 가끔 로테이션으로 베이스가변경되기도 한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동하고 떠나고,
또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돌아오고 떠나고.
그 반복 속에서 하나의 감각을 얻게 되었다.
불필요한 소유나 낭비 없이
꼭 필요한 것만 가지는 감각
처음엔 다 필요해 보였다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
여행지에서 사 온 독특한 기념품. 추억이 담긴 선물.
유행하는 전 세계 아이템들.
손이 안 가지만 언젠간 입을 것 같은 옷들...
하나씩 내려놓았다. 언제 떠나도 가벼울 수 있도록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의 물건을 줄여나갔다.
출국할 때는 보통 짐의 제한이 있다.
항공사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기내는 7~10kg,
위탁수하물은 25~40kg 정도이다.
체크인 시 무게에 따라 추가요금을 내기도 하고
돈을 내도 일정기준을 초과하는 물품은
위탁할 수 없다.
한 나라를 떠날 때도 이렇게 짐의 제한이 있는데
하물며 이 삶을 떠날 때는 어떠한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죽고 나면, 나의 짐들을 누가 정리할까?”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 유한한 삶을 살고 있고
언젠가 그 삶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나의 마침표 앞에서
나의 주변 사람들은
내 유품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의미를 부여했던 물건들,
소중하게 아끼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노동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짐이 너무 많다면?
낡고 부피가 큰 것들로 가득하다면?
그 물건에 담긴 내 추억이
타인에게도 전달될 리는 없다.
주인이 떠난 물건은, 그저 짐일 뿐이다.
유품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떠나보내는 수고로움이 되기도 한다.
살아있을 때 선물 받은 예쁜 가방과
세상을 떠난 자의 방에 놓여 있는 예쁜 가방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나눠주고 싶다.
내가 떠난 후 남기는 것은
'물건'이 아닌 '기억'이길 바란다.
수많은 이사와 출국, 그리고 승무원 생활을 통해
가장 필요한 것만 추려서
딱 그만큼만 데리고 가는 훈련을 해온 것 같다.
그게 바로 삶의 본질을
추리는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늘 무언가를 더 가지라고 속삭이지만,
나는 오늘도 내게 정말 필요한 것만
고요히 가려내는 감각을 다듬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