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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첫사랑은 포옹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디테일즈 매거진 웹진 1호 <사랑>_첫사랑을 시작할 준비

by 디테일즈 매거진


열여섯. 누구는 첫사랑이 시작되는 나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는 남들과 조금 달랐다. 당시 이상형을 생성형 AI처럼 그려본다면, 갈색 눈동자에 싸구려 왁스인지 내추럴 기름인지 모를 머리칼을 흘려 넘긴 백인 소년이랄까―사실 아직까지도 그렇다. 물론 내가 살던 곳은 외국인이 지나쳐가지도 않는 동네였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내내 꿈꾸던 남자친구는 유럽 어디선가 살고 있는 소년이었다. 한국 드라마는 이미 초등학생 때 졸업. 중학생 때부터는 외국 드라마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함께한 시간으로만 따지면 나의 첫사랑은 떡볶이다. 나는 옆 학교 남학생보다는 엽기떡볶이에 관심이 더 많은 여중생이었다. 그러니 넉넉하던 교복은 곧 옷장 깊숙이 처박혔다. 교복 치마 대신 체육복만 입을 만큼 살이 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보다 덩치도 작고 지루한 남자애들은 나도 노땡큐였다. 서로에게 무관심이라고 해야 맞다. 궁금하지 않은 인트로를 넘기듯 첫사랑은 가볍게 스킵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바라던 모습의 소년이 나타났다.



유리창 너머로 오토바이를 세우고 있는 그가 보인다. 막 헬멧을 벗어서 밝은 갈색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다. 왼쪽 귀에서 빛에 반사된 은색 피어싱이 반짝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담배를 무느라 들어오지 않는다. 누구나 관심이 가는 미소년이지만 막상 다가가긴 어려운 사람. 분명 내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공원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땀에 젖은 티셔츠는 아무 데나 벗어 던져 놨다. 멀리서 걸어오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반가운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축축한 몸으로 나를 껴안는다. 헤드폰이 툭 떨어져, 듣고 있던 Oasis의 Cigarettes and Alcohol이 세어 나온다. 볼륨은 심장 소리처럼 점차 커지며 BGM으로 깔린다. 그렇다. 그는 나의 스크린 첫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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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png My Mad Fat Diary © Channel 4


시작은 이렇다. 10년 전 페이스북에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영상이 있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뚱뚱한 여자와 잘생긴 남자가 학교 화장실에 갇혀 있었다. 여자는 곧 둘의 관계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온갖 악담이다.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보였다. “너 같은 애는 나 같은 애와 어울리지 않아.” 자존심이란 변기에 넣고 내린 것처럼 말을 했다. 듣던 남자는 멍청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소리친다. 그래도 멈추지 않자, 키스로 입을 막아버린다. 둘은 흥분을 멈추고 서로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인다.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 일명 'MMFD’이 한국 팬들을 모은 유명한 장면이다. 아직도 다시 이 장면을 보면 입꼬리가 미친 듯이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다. 이름도 모르는 영국의 뚱뚱하고 미친 소녀를 보던 스크린에 비쳐진 내 모습 때문일까. 그 둘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곧바로 정주행을 시작했다.



ㅇ.png 갱 친구들, My Mad Fat Diary © Channel 4
ㄴ.png 핀, My Mad Fat Diary © Channel 4

주인공 레이 얼(Rae Earl)은 폭식과 잦은 자해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 남들에게는 끝내주는 휴가를 다녀왔다고 거짓말 해둔 상태. 퇴원 후 상담 치료를 받으며 의사의 권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제 막 정신병원을 퇴원한 열여섯 소녀의 관심사는 단순하다. 새로 사귄 친구들, 그리고 남자다. 일기장은 곧 모든 남자들에 대한 성적 상상으로 채워진다. 병원 주치의는 여성 호르몬이 폭발하게 만드는 Dr. dick으로 소개되는 식이다.

절친 클로이의 소개로 어울리게 된 새로운 친구들, 갱(Gang)에 대한 내용도 빠질 수 없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건 역시 남자다. 첫눈에 반해 키스까지 성공한 아치(Archie). 그는 알고 보니 게이였다. 하지만 덕분에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핀(Finn)을 다시 보게 된다. 핀은 레이의 용기 있는 모습을, 레이는 핀의 다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브릿팝이 전성기를 맞이한 90년대. 음악에 있어선 누구보다 자신 있는 레이와, 방 안에 앨범 CD가 가득 쌓여있는 핀은 점점 가까워진다.


ㄹ.png My Mad Fat Diary © Channel 4

핀은 곧 레이를 좋아하게 된다. 전생에 무슨 공을 세운 걸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는 남자가 생긴 레이가 부러웠다. 게다가 핀은 백마 탄 왕자 같은 남자 주인공이었다. 레이도 핀을 좋아했다. 하지만 핀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다. 레이의 말을 빌리자면, 핀은 11점이고 레이는 4점이기 때문이다. 핀은 학교 퀸카 스테이시의 팔짱을 끼고 있어야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레이는 그런 핀과 있으면 불편한 눈길과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을 인물이다. 레이는 아직 16살이다. 남들의 시선과 잣대는 핀을 피하고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Dear Diary(일기장에게)"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레이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다.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가끔 레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과 행동으로 엄마와 새로 사귄 소중한 친구들에게 상처를 줬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떠나게 만들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토록 끊으려고 애쓰던 폭식과 자해의 굴레로 다시 빠졌다. 위태롭고 연약했다.



레이와 캐스터 선생님의 상담 치료 장면, My Mad Fat Diary © Channel 4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근데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든.
난 언제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돼지일 거야.
난 언제나 사람들에게 상처줄 거야.
난 언제나 사람들을 실망시킬 거야.”



캐스터Dr. Kester 선생님과의 상담 시간. 레이는 자신이 "과체중이고, 못생겼고, 일을 망쳐버리고, 노력해도 늘 어긋나고, 치료해도 소용없는 미친 사람"이라서 싫다고 말한다. 레이는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싫어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핀의 사랑도 믿지 못했다.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믿었다. 모든 관계를 망치고 자기 자신도 망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피하고 도망치려는 레이에게 캐스터 선생님은 말한다. “무섭고 불안할 때마다 10살 어린 아이였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자신을 달래야 한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럼 너는 어떤 상황도 맞설 수 있을 거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 앞에서, 레이는 도망가지 않고 맞선다. 10살 어린 소녀에게 말하듯, 자신에게 "You’re perfect(넌 완벽해)"라고 말하며 용기를 낸다. 캐스터 선생님의 말처럼. 사실 레이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레이가 유일하게 흩어진 갱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접착제라 말한다.


레이가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나도 비로소 그녀를 다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있어서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열성적이고, 어떤 일이든 가장 재미있게 만들어 말하는 능력이 있다. 갱 친구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못할 비밀도 레이에게 털어놓는다. 타인의 존재가 가장 절실한 상황에서 레이는 그 곁을 지켜준다. 레이는 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My Mad Fat Diary © Channel 4



무자비한 타인들의 잣대와 끝없는 자기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랑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매 시즌의 끝무렵에는 레이와 핀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행복하게 끝날 줄 알았다. 레이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무시무시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레이 자신뿐이었다. 핀은 떠난다. 핀이 떠나야 레이가 한 발자국 더 나갈 수 있다. 이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은 없었다. 핀은 훗날 자식들이 발견하고 흥미로워할 첫사랑의 사진 속 모습으로 남는다.


긴 이야기의 끝에서 레이가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첫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난 핀. 그에게 빠져 시작한 드라마에서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레이의 성장 과정이었다.


레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남았다. 열여섯의 내가 첫사랑을 시작하지 못했던 이유는 레이처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좋아하려 하지 않았던 건,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어릴 땐 알 수가 없었다. 스물넷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나는 정말 솔직하지 못했구나. 교복 치마를 입어보며 상심하고 현실에서의 첫사랑은 꿈도 꾸지 못했던 나. 열여섯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모습이 영영 잊혀지지 않듯. 그 시절 내 모습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있었다.


에곤 실레, 《포옹》(1917) | Public domain image via WikiArt


불안감과 괴로움이 나를 외롭게 한다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는 그런 나를 기꺼이 받아줄 타인의 존재일 것이다. 포옹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제스처이다. 누군가를 온몸으로 껴안는다는 것은 특별하다. 상대의 체온을 느끼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킨십은 포옹이 아닐까.



하지만 타인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껴안을 준비가 필요하다. 나의 몸 구석구석을, 가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이기적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들기 쉽다. 지우고 싶은 자신의 단점과 콤플렉스, 피하고 싶은 자신의 문제까지 모두 껴안을 수 있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남들은 이미 발견한 자신의 강점과 매력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놀란다. 구석구석 마음에 든다. 팔에 남은 튼살은 나의 끈질김을 증명하고, 대장부처럼 튼튼한 다리는 나이가 들면 모두가 부러워할 다리라고 한다. 매일 바마다 요가를 하며 온몸을 돌봐준다. 무릎을 가슴에 붙이고 나를 꼭 안아준다. 나는 진짜 첫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에디터 마레의 사랑 이야기는

To be continued ―가장 좋아하는 핀의 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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