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그르르~ 동전이 거실 바닥 위에서 한참을 돌다 멎는다. 빛 한 점이 둥글게 흔들리다 이내 평평해지며 납작 엎드린다. 수영은 바닥을 본다. 앞면이면 바다, 뒷면이면 산으로. 오늘은 그녀의 생각 대신, 동전의 앞뒷면에 길을 맡겨보기로 한다. 결정이 아니라, 흐름에 몸을 맡겨보고 싶은 하루다.
서둘러 가방을 싸고 코트를 팔에 휘감는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 안의 온기가 조용히 등 뒤로 접힌다. 시동을 걸고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도시를 벗어나 시골길에 접어들었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가을바람이 피부 위로 얇게 스친다. 마른풀과 곡물을 찐 듯한 구수한 볏짚 냄새, 습기를 머금은 흙 내음, 그리고 구릿한 퇴비 냄새가 바람결을 따라 느리고 깊게 퍼져온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정겨운 냄새인가.
노랗게 마른 들판이 유리창 너머로 미끄러지듯 밀려간다. 깜빡이 소리가 톡톡, 고요를 살며시 흔드는 순간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해인사>.순간 가슴 안쪽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래, 거기로 가보자.’
목적지가 정해지자 내비게이션을 켠다. 차 안 공기가 아주 옅게 달라지는 느낌이다.
산사로 접어드는 길은 익숙한 듯 낯설다. 창틈으로 스며든 산내음이 오래전 누군가의 체온처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잠시 히터 바람을 줄인다. 길은 점점 조용해지고, 나무 그림자가 유리 위로 천천히 길게 드러눕는다.
차를 세우고 바닥에 발을 내딛자 서늘한 흙 기운이 발목을 감싸고, 밟힌 솔잎이 바사삭 폭신하다. 솔향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개운해진 마음으로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부드러운 결을 남긴다. 난간을 짚자, 부드러운 나뭇결이 손바닥에 잠시 머문다.
대웅전 앞에 서자 둥— 둥— 북소리가 산을 타고 번져온다. 공기가 한 번 멈추고, 그다음 순간 가볍게 흔들린다. 눈을 감는다. 빛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다. 혀끝에 오래 눌러두었던 말 한 조각이 떠오르다 또 조용히 가라앉는다.
경내를 돌아 나오다 작은 찻집이 보였다. 문을 열자 따뜻한 향이 먼저 코끝을 스친다. 스님이 내어준 잔에는 연둣빛 보이차가 담겨 있었다. 한 모금 머금자, 입안 가득 쌉싸래한 향이 퍼지고, 목을 타고 내려가자 고요가 안으로 번졌다. 달지 않은 맛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따뜻하던 잔이 식어가자 손끝이 서늘해졌다. 입안에 남은 쌉싸래한 향이 목 뒤에 머물렀다. 마치 오래된 기억 하나가 천천히 식어가는 맛이었다.
찻잔을 비우고 밖으로 나오니, 색색의 소원 쪽지들이 줄에 매달려 춤을 춘다. 파랑, 빨강, 노랑, 연분홍빛 쪽지들. 각자의 절실한 마음을 묶어 매달아 놓았다. 수영은 펜을 잡았다가 놓아버렸다. 차마 쓸 수가 없었다. 꼭 전하고 싶었지만, 이젠 아무 의미가 없어진 뒤늦은 후회였기에. 그래도 저 하늘이 전해주기를 바라며 두 눈을 살며시 감아본다.
조금은 고요해진 마음을 안고 돌아서려는데, 조금 앞쪽의 노란 쪽지가 햇빛에 빛나며 파르르 떨고 있다. 손끝이 그 종이를 붙잡는 순간, 글씨가 눈에 박힌다.
잘 지내고 있지? 너무 보고 싶다.— SH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현기증이 나는 듯하고, 꿈속을 걷는 듯하다. 가슴 어딘가에서 오래 묻어둔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손바닥이 종이의 미세한 온기를 느끼며 붙잡지도, 놓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그래. 네가 왔다 갔구나. 그땐 미안했어.’ 바람이 그 말을 대신 데려가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번엔 동전이 아니라, 자신의 발걸음으로.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살짝 방향을 바꿔 불었다. 햇빛이 어깨 위에 닿았다. 그 온기가 이상하게도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