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로는 행복하다
인간은 아무 문제가 없어도 문제화를 시킨다. 반대로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마음을 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내 인생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망한 인생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기준을 어디로 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일을 겪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이끌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는 좋은 것들이 한정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 흔히 그것을 망각하는 것마냥 이야기한다. 그것의 대표적인게 공부, 연애, 일, 학력, 돈 같은 외적 자본이다. 가끔 생각해보면 이 모든건 누군가는 못 겪는 것들이다. 낭만주의적 사랑은 근대의 산물이지 원래의 사랑의 형태는 아니다. 단지 어떤 환상을 만든 것이고 그것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유희하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것의 기준을 세우게 되면 낙오자라 할 만한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임에도 말이다. 연애라는게 누구에게나 허락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걸 성인이 되면 알게 된다. 그것을 겪지 못하든 말든 사실 좋은 쪽으로 유도하는게 인간의 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나 곤충들도 짝짓기에 실패하는 개체들은 넘쳐난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연애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미디어들이 그것의 기준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연애라는게 자연스럽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외부 자본들은 어떤 시스템의 기준이다. 따라서 그것을 갖는 자들은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한다. 아무도 겪지 못할 화려한 연애를 한다면 누군가는 당연히 그걸 못겪는 것이다. 화려한게 범람한다면 그건 화려한게 아니다. 누구나 똑똑하다면 똑똑한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외부적 잣대를 두어 노력이니 재능이니 평가하는 것 보다는 하고싶으면 하라는 식의 행동 강령으로서 제시하는게 건강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는게 얼마나 시스템에 의존하는지는 시대가 바뀌어도 느끼지 못한다. 대게 그것에 대해 숙고를 해야지만 얻어진다. 나는 그걸 걸그룹이 바뀔 때 마다 느끼는데, 항상 여자 외모의 기준이 달라지는 느낌이 있다. 언제 부턴가 화장법이 바뀌고, 과거 여성들의 화장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여겨진다. 아마 문화라는건 그라데이션 처럼 바뀌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인식하기란 힘든 것 같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따라서 시스템이 극단적으로 바뀌어 죽음으로 치다르지만 않는다면 생존해나간다. 따라서 지금의 기준이라는게 영원하지가 않고, 그것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할 이유도 가끔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어설프게 영화나 드라마에서 앞잡이 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찬양하는 앞잡이조선인 순사들 같은 사람들이 영화에 나오면 어른들은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소하게나마 우리 곁에 존재한다. 어느 곳에 소속감을 가지는 것은 사회 뿐만이 아니라, 문화도 그것에 속한다. 자신이 얼마나 현대적인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경쟁한다면, 사실 문화적인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 말이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들 매체에서 위에서 말한 사회적 자본인, 외모, 학력, 돈 같은 것들에 대해 회의한답시고 그럼에도 가지면 좋으니 가질 수 있으면 가지라는 식의 조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은 기만적인 언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게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식의 이야기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후회도 한다는 식의 프레임을 가져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트지만 인간적인 모습도 챙겨가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 의도야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마 조금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생각까지는 도달 할 거라 생각한다. 듣는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가질 수 있다면 가지는게 낫다는 식의 조언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보통 글이나 영상에 어그로를 끌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명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유치한 일이다.
그것들을 안좋게만 바라 볼 이유는 없다. 그런 것들이 돈이 되는 시기이다. 안 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오히려 내가 말한 것이 너무 높은 잣대를 들이미는 꼴일 수도 있다. 다만, 현실이 이런 식이라면 적어도 넘쳐나는 속임수에 꾀어들어가지는 말아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든다.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는 걸 학생때 부터 선생들이 농담으로 말하지만, 그런건 없다. 애초에 그거는 운명의 일이라 치부하는게 합당한 처사인지도 모르겠다. 확률이야 높인다는 마음가짐으로 스펙을 쌓고 실적을 올리고 살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외부의 성과를 기준에 둔다면 억울함이 생긴다. 억울하면 적어도 행복하진 않다. 따라서 하다보니 성과가 돌아오는 구조를 만들어야하지 않나 생각이든다.
얻을라면 얻을 수 있지만, 얻지 못하기도 하다. 내가 이야기하는건 항상 이런 식이다. 철학, 과학이나 기타 학문, 합리주의, 그리고 논리의 허점이 뭐냐면, 개인을 불행하게 한다는거다. 애초에 나의 직관이나 사고체계가 세계보다는 좁을 수 밖에 없으니, 그것들을 완전히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걸 설명하겠다고 덤비는 게 오만한건지도 모른다.
흔히들 바보가 더 행복한지 모른다고 막연히 추측한다. 그러나 그게 더 어려운 경지인지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진심으로 바보 되기란 쉽지 않다. 세상 기준에서 바보나 광대라는건 비웃음을 산다는 건데, 위에서 말한 기준을 놓는 것에 해당한다. 기준을 놓은 사람들은 이상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왜 합당한 우리의 시스템안에서 놀고 먹지 못하는거지라고 조소한다. 그러나 역으로 광대가 우리를 조소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생 불행하게 살다 가라고 말이다. 광대가 우리를 웃기는 행위가 가끔은 섬뜩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심으로 우리를 조소하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그것이 우리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한 가장이나 연극이 아니었다면? 그렇기에 무서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뭐든 가능하다는 말은 신학에 연결되는 것 같다. 인간이 신을 만들든, 우리가 신의 형상을 닮은 것이든 그것의 속성은 가능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그게 결과로 결부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시대가 맞아야하고, 운이 시의적절하며, 나의 건강을 따져야하고 등등. 이런 조건을 나열해 나가는게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딱 맞아야한다. 인간이 무엇이든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되지 못 할 수도 있다. 애초에 가능성은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 보고 우리는 뭐든 가능한 나이라고 한다. 돈을 빌게이츠 마냥 벌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혼동하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 측면에서만 바라볼 때 모든 세상의 말들은 소음에 불과하다. 그냥 어떤 일이든 말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덧붙이면 되기 때문이다. 죽지않는다면 행운이다. 죽으면 인생이 끝나므로 앞으로 생각할 이유도 없어진다. 가끔은 이런 가벼운 생각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