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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심

by abecekonyv

새벽의 결연함은 사람을 어떨 때는 사람을 일깨운다. 자정이 되어 갈 무렵, 자갈을 흐트리며 걸어오는 사람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호롱불이 부유하는 영혼들을 인도하듯이 길을 비추고, 스님의 도포 자락이 차락 차락 흔들리며 자갈들을 이리저리 굴린다. 그의 반질반질한 머리 위는 땀 구슬들이 맺혀있다. 등잔燈盞의 빛이 한 여름의 무더위를 가중시키고 있었다. 묵언 수행을 한지 어언 이주가 다 되어가는 날, 마음 속으로 불경 구절을 읇조리며 터벅터벅 걸어간다. 불당 앞 금빛 부처의 온화함은 새볔 귀뚜라미와 두꺼비의 울음소리와 맞물려 인간을 공명했다. 스님은 내면에 피어오르는 떨림을 애써 감추며 고무신을 벗는다. 호롱불을 옮겨 붙여 법당을 환하게 만든다. 빛이 금빛 부처의 배에 반사되어 스님의 머리를 비춘다. 스님의 머리에 반사 된 빛은 부처 광배에 그려진 지옥도를 비춘다. 꺠달음을 얻고 신통력으로 중생의 삼세三世를 꿰뚫어 헤아렸다는 부처는 그들을 하나의 빛으로 품어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스님의 머리 빛이 중생들을 품는지도 모른다. 스님이 수통을 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자, 목으로 흘러내린 차가운 물이 안에서 피어오르는 열감을 낮추었다. 그제서야 마음의 평온을 찾은 듯이 그는 108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무릎이 쑤시지만, 젊은 스님에겐 그 정도의 기력이야 충분했다. 굽이치는 무릎의 노동에 아래에서 부터 열이 머리 위로 올라온다. 그러나 등산 할 때의 아려오는 열감과는 다른, 육체의 경쾌한 고통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육체의 위안이 되어간다. 공기를 가르는 도포의 소리는 중생들의 죄를 멸하는 칼이 되어 석류 알 하나하나를 터뜨리 듯 섬세하게 작용한다. 108배가 끝나자 이제는 결연히 앉아 불경을 읽는다.


"잠에서 깨셨나 봅니다." 귀신이다. 필시 이건 귀신의 목소리이다.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경을 머리속으로 왼다. 주지의 목소리를 하고 있지만, 이 새벽녘 발소리도 없이 덩치 큰 주지가 왔을리 전무했다. 키가 8척은 되는 늙은 주지의 걸음은 자갈밭에서 도무지 조용할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등 뒤에 바람이 살을 하나 하나 에워싸서 온도를 낮추었다. 여름의 바람은 아닌 듯 했다. 올라 올 적에 바람이란 불지 않았다. 단지 습하고 흙냄새만 진동했다. 바람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불었더라면, 소나무들이라도 흔들렸어야 했다. 그러나 나뭇잎도 떨어지지 않는 적막한 새벽 산기슭에 이런 음산한 바람이야 존재하기 만무했다. 스님은 자신의 환영을 이겨내기 위해서 한문을 속으로 음독한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대다라니 계청 계수관음대비주 원력홍심상호신 천비장엄보호지 천안광명변관조 진실어중선밀어 무위심내기비심 속령만족제희구 영사멸제제죄업....' 천개의 얼굴과 천개의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이 저 귀신을 물리쳐주기를, 아니지 그것을 바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독송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나의 번뇌는 내가 짓는 것임을. 따라서 저 환영이 외부에 있든 나의 안에 있든 그것은 상관 할 바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순사들이 절에 들어올겁니다." 천수경을 거의 다 독송하려니 재수가 옴 붙었는지 원. 누군지도 모른 잡귀신이 법당 안에서 나의 괴로움을 더해간다. 나는 뒤로 돌아 형체를 마주 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포 자락의 소리가 번개가 되어 나의 몽롱함을 일깨워 주길 바라면서 옆으로 젖혀 돌아본다. 등잔은 나의 자리만을 비추고 있었다. 내가 불경에 집중하다보니 환하게 비춰놓았던 법당안이 깜깜해진 것 조차 몰랐던 것이다. 내 곁의 호롱불이 부처의 얼굴을 밑에서 부터 비춘다. 바둑판 같은 법당 천장 아래로 비춰지는 금빛 부처의 거대한 음울함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음산함에 다시 한번 돌아본다. 아깐 분명 아무것도 없었거늘. 저기 달빛을 뒤로 비춰 역광을 내는 형체가 서있었다. 주지의 육체이다. 귀신이 아니라 주지였다니. 젊은스님은 긴가민가한다. 그러나 저게 주지인지 어떻게 아는가. 왠지 모르지만, 백팔배의 피로 때문인지 무릎 꿇은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스님은 다시 돌아 천수경의 구절로 돌아온다.


"자애로운 부처님은 모든 걸 굽어보십니다." 스님은 보슬보슬 젖어가는 도포자락이 살결에 달라붙는 것을 의식한다. 손목에 건 염주를 빼내어 굴린다. 다시 한번 불경을 읽어 내려간다. 내가 숨겼던 칼은 이 부처상 뒤에 숨겨져 있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해도 나의 의식은 거기에 있었다. 주지가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나에게 남은 행동이란, 겨우 읇조리는 것 밖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지금 나에게 돌아본다는 것은 용기의 행위이다. 그러나 왠지모를 근육의 긴장감이, 단지 나의 앞으로만 기울어지게 만든다. 나의 목이 빳빳하게 시선을 고정하고,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아했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정신이 만들어낸 육화의 작용이다. 초연해지고 싶다는 나의 욕구가 나의 몸을 비틀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비가 안쪽으로 쳐들어와 마루가 젖어있었다. 달빛은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도 나의 버선발은 젖어들어갔다. 그러나 보슬비가 소나기가 된 것인지, 침소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나는 잠을 청해야 할 것 같다. 아침에 몰래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면 될 것이다.


비 한 줄기 마다 보이진 않지만 나를 비추고 떨어질 것이다. 그것들이 천개의 얼굴을 가진 천수관음이 나를 굽어보는 것 같다. 케르베로스가 왜 세 개의 얼굴을 가지는가. 사실 적은 숫자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양이 폭증하면, 그것에 상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일한 상징만이 허락된다. 인도의 숫자 체계는 큰 수에 대한 관심이 강하다. 숫자의 언명에 규칙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로 보아야 한다. 큰 수가 가지는 힘. 하나의 브라흐마를 바라보는 것. 이름 따위야 중요하지 않다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저지른 죄도 크게본다면 미개한 일에 지나지 않을거라는 의심. 나는 그렇게 생각해봤다.


그러나 터져오르는 뜨거움을 참지는 못했는지, 나를 무릎꿇리고 석류알을 토해내게 한다. 나의 토사물들이 적빛으로 물들어 있다. 내 안에서 나온 것들 조차 나를 굽어본다. 스님이 죽으면 사리가 나온다지 않은가. 내가 뱉어낸 사리들은 지금 천개의 알들이 넘쳐나는 것 같다. 세포 단위 하나하나 따진 다면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우주가 들어있다. 아, 나의 죄는 벗어나기 힘든 것이구나. 굽어보는 부처님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미 부처님은 중생들의 삼세를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신지 오래였구나. 장구한 미래에 나같은 놈이야 또 새로 태어나겠지. 사실 나의 죄도, 앙굴리마라의 죄 역시도 사실은 인류사에서 미개하기 그지 없다는 것을. 설령 사람이 죽었다 할 지라도, 사람이 죽은 것은 우주를 죽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무한 앞에서 먼지 한 톨과도 같은 죽음이다. 그리고, 그런 무한한 수를 감당하는 브라흐마는, 무한함 보다는 무한함의 추상을 품는 것이 아닐까. 브라흐마 앞에서 떨어지는 빗줄기의 수 하나 하나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내가 저지른 죄업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 처럼 말이다.


아, 멀리서 횟불이 보인다. 나의 종말도 다가온다. 종말이라기 보다는 또다른 시작이겠지. 일본인 순사들이 누런빛 제복을 입고 척척 걸어온다. 저기 다른 스님을 앞세워 따라오고 있다. 나는 자결하는 것도 마음 속으로 무른 상태다. 그것이 죽는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지나친 정조를 지키는 것은 집착이 아니던가. 나의 죄를 안다면 그것을 받는 것도 수행의 일부가 아닐까. 삶이 고통이라면 그것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사실 아무 의미 없다. 그러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이 법에 나는 오늘도 깨닫지 못한다. 순사들이 내게 앞으로오자 뒤의 군인들이 장총을 내게 겨눈다. 나는 일본어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죄를 안다. 지금 죽더라도 나가야겠지. 그러나 나는 찰나의 초,분이 지나갈 때마다 망설임을 느꼈다. 시간 단위를 잘라보여도 그것에는 나의 중생심이 뭍어나오는 구나. 나는 한참 멀었다.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총열이 적어도 나를 반겨준다. 나는 저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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