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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

by 어느니


사제지간의 정이란 말이 무색해진 요즘이다.


작가는 <삶을 바꾼 만남>을 통해 230여 년 전 조선 후기 정조시대, 시골 아전의 아들 황상과 스승 다산과의 만남을 통해 가고 오는 정, 켜켜한 상호작용이 성장의 밑거름이 됨을 보여준다.


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다산아들 정학연,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초의선사 등 다학문 간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학문의 융합은 시대를 초월한 통찰과 지혜의 서사, 변화와 성장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혀 답답한 세 가지 병통(깊이 뿌리 박힌 습관이 된 결점) 이 있는 저도 공부할 수 있나요?"

황상의 물음에 다산은 이렇게 답했다.

"한 번만 읽어도 바로 외우는 사람은 자기 머리가 좋은 걸 믿고 대충대충 소홀히 넘어가기 마련이다. 글씨를 머뭇거림 없이 잘 쓰고 잘 짓는 사람은 자기 재주가 좋은 것에 마음이 들뜨기 쉽고, 남들보다 튀려고 하겠지. 배우고 바로 깨닫는 사람은 단박에 깨달아 오래가지 못한다. 너 같이 진득한 아이가 공부를 해야 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히 마음을 다잡아 공부해라"


무릇 공부는,

“파껍질을 벗겨내는 것과 같다. 파를 어떻게 다듬더냐? 먼저 뿌리 밑동을 잘라낸다. 그리곤 겉껍질을 벗겨내야지. 뽀얀 속살이 나올 때까지 껍질을 벗겨내야 한다. 질긴 껍질을 벗겨내야 순수한 속살이 나온다. "

그저 읽기만 해서는 하루에 백 번 천 번을 읽는다고 해도 안 읽은 것과 다름없다. 독서는 뜻 모르는 글자를 만날 때마다 널리 고찰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서 근원이 되는 뿌리를 얻어야 한다. 지식이 미치면 한 글자 한 구절도 문심혜두(文心慧竇: 글의 속뜻, 지혜의 문)의 열쇠가 된다.


닭을 치는 일도 공부다. 그저 하지 말고 살펴서 해라. 책 찾아서 읽어가며 해라. 보는 것 정리하고 메모해 가며 해라.

어떤 일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삶의 모든 부분을 공부의 과정과 일치시켜라. 세상 모든 일이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아래에서 배워 위로 향하는 비근한 학문, 쉬운 지식을 배워 어려운 이치를 깨닫는 공부의 묘미를 말함이지요.


"세상 선비들이 큰 공부를 못 하는 이유를 아느냐? 과거 시험 준비 때문이다.”


다산은 제자와 자식에게 곤궁할수록 공부에 정진해서 큰 사람, 청복이 주는 삶의 가르침으로 일침을 놓는다.

무실 선생이란 이가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다산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국화를 기르는가? 복숭아와 자두, 매화와 살구 같은 것은 꽃과 열매를 두루 갖추고 있소. 열매가 없는 꽃은 군자가 마땅히 심을 것이 못 되오.”

허(虛)와 실(實).

손으로 잡히는 것, 입으로 삼키는 것만 실(實)이라 할 수 있는가?

이에 다산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그려. 형체와 정신이 오묘하게 합쳐져 사람이 됩니다. 형체만 기르면 정신이 굶주릴 수 있습니다. 열매가 있는 것은 입과 몸뚱이를 길러주고 열매가 없는 것은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하지요.”


사람은 정신과 육체를 합친 존재다. 열매는 육체를 기르는데 보탬이 되고 꽃은 정신을 기르는데 기여한다. 시련과 역경에 사람은 어찌하는지, 고통 속에서 정신의 뼈대를 세우고 내면의 향기를 어떻게 발산하는지를 국화를 보며 배운다고 하였다.


정신세계의 가치와 의미를 설하였다.

국화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마음가짐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빗대어 드러내고자 하였다.



황상은 만년에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만 한 작은 집)에서 기거하였다.

일속(一粟)의 의미는 불가의 수미산과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비유에 견준 후 유가식으로 풀이한 것으로, 대지가 넓고 생물이 수없이 많다 해도 바다에 견주면 한 줌 흙덩이일 뿐.


자신은 한 줌 흙덩이 구석진 바닷가에 사니 좁쌀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 황상이 기거하는 일속산방이 겨자씨 한 알만큼 보잘것없고 작아도 그 안에는 광대무변한 자족의 세계가 있음을 기리는 거지요.


15살, 스승이 내려준 삼근계(三勤戒: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해라)의 지혜와 가르침 그대로 일속의 마음으로 평생을 다그치고 영위한다. 신분의 한계와 기질적 특성, 그를 둘러싼 환경이 자신을 알아주고 뿌리와 날개를 달아주었던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함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세 가지 병통이 동일시되는 면이 있어 공감이 되고,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기며 살다 간 황상에게 경외심마저 든다. 자신의 그림자, 혹은 스승의 그림자에 발이 묶여 스승의 뒤에 숨은 인재로 남은 건 아니었을지 아울러 살펴본다.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관계'를 통한 배움과 실천, 사람이 되어감, 일과 공부로 거듭난 이들의 아름다운 삶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누군가로 살 수 있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할까? 서로를 제대로 알고 수용하는데서 시작되어야겠지.

눈높이를 맞추는 거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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