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2. 알아야 할 나

by 사피엔




한 가지 얼굴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고대의 연극에서 배우가 쓰던 가면을 뜻하는 용어, 페르소나.

심리학에서는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사회적 얼굴을 의미한다. 특히 칼 융은 인간이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보았다.



직장에서의 나, 가족 앞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글을 쓰는 나.



이 모든 모습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여러 얼굴 사이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완전히 놓쳐버릴 때 시작된다.



사람이 힘들어지는 이유는

페르소나가 많아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전부 진짜 나라고 착각하거나 혹은 전부 가짜라고 밀어내버릴 때다.



나는 지금 호텔 프런트에서 일하며

분명 ‘서비스용 페르소나’를 사용하고 있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술이다.



다만 중요한 건,

그 가면이 벗겨졌을 때

내가 껍데기처럼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해마보다 편도체가 더 발달한 것 같은

이 감정 많은 인간으로서의 나는

사소한 감정들을 매일 겪는다.



외로움, 짜증, 자존감, 걱정, 불안.



이 감정들은 페르소나가 아니다.

그 아래에 있는, 더 근원적인 층이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다만 그 얼굴들 뒤에

지속되는 무엇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속되는 나’는 무엇일까.



하나의 고정된 성격일까, 변하지 않는 신념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지속되는 나는 단단한 어떤 것이 아니라

변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흐름, 그런 힘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나는 달라지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는 것.



말투가 바뀌고, 태도가 달라져도

그 모든 선택의 방향에는 어떤 일관된 결이 남아 있는 것.



그 결이 바로 나일지 모른다.



어쩌면 중요한 건

‘진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드러나고 있는 나를 제대로 알아보는 일일지도…



나는 언제 가장 솔직해지는지, 어떤 순간에 불편함을 느끼는지, 무엇 앞에서 유난히 예민해지는지.



그 사소한 반응들이 가면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설명하고 있다.



가면은 필요하다. 우리는 역할을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그 역할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내 감정이 아니라 역할에 맞는 감정을 연기하게 된다.



웃어야 해서 웃고, 괜찮아야 해서 괜찮다고 말하고,

버텨야 해서 버티는 상태.



그 상태가 익숙해지면

혼자가 되었을 때조차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지속되는 나’란 대단한 어떤 실체가 아니라,

가면을 벗었을 때 조용히 올라오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고.



외롭다면 외롭다고, 짜증이 난다면 짜증난다고,

불안하다면 불안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는 상태.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껍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결국 우리는

여러 얼굴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존재가 아니라,

여러 얼굴을 알고도 흔들리지 않는 방향을 가진 채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방향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지나며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끝내 놓치지 않는 데서 조용히 만들어진다.










수, 금, 일 연재
이전 21화사피엔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