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조건들
실제로 정착이 가능하려면 많은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지방에서 창업하거나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남을 수 있는가'는 단지 일자리의 유무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착은 복합적이다. 생존 가능성, 생활의 질, 관계, 감정, 재시작 가능성까지 포함된다.
이 글은 정착의 조건을 세분화하고, 실제 통계와 수치를 기반으로 정착을 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좋은 일자리는 정착의 출발점이다.
적정 소득, 예측 가능한 반복, 성장 가능성이 있는 직업은 단순히 생계를 넘어 관계와 정체성까지 결정짓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이직률이 1년 내 50%를 넘는 지역 일자리는 정착률도 평균보다 35% 낮다(2022년 고용동향 분석).
특히 비수도권 청년층의 재이탈률은 취업 후 3년 내 42.7%에 달한다. 단기 프로젝트, 파견직, 외주 위주의 생계형 일자리는 정착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어렵다.
일이 없으면 관계도 끊기고, 공간의 의미도 약해진다.
주거는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다.
'살 수 있는가'보다는 '살기 좋은가'가 관건이다.
국토연구원 보고서(2023)에 따르면, 청년 지방 이주자 중 정착 포기 사유 2위가 ‘주거 환경 불만족’이다.
(1위는 소득 불안정, 그리고 3위는 ‘생활 인프라 부족’.)
지방은 수도권보다 주거 비용이 낮지만, 질 낮은 매물, 대중교통 접근성 부족, 단절된 동네 구조 등은 장기 거주를 어렵게 만든다.
공간이 단지 저렴하다고 정착이 가능해지는 건 아니다.
지속 가능한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일이 있고, 집이 있어도 ‘사람이 없다’ 면 그 지역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비수도권 정착자의 이주 후 2년 내 ‘심리적 이탈률’은 47.8%에 달한다. 이는 ‘실제로 떠나지는 않았지만, 기회가 되면 나가고 싶다’는 응답이다.
그중 관계 단절, 협업 기회 부족, 지역 내 배타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일터 바깥에서의 역할, 반복적인 만남, 정서적 피드백, 그리고 ‘실패했을 때 같이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정착에 영향을 미친다.
혼자일 땐 주거와 일자리가 거의 전부다. 하지만 자녀가 있거나 가족과 함께 정착하려는 경우, 교육과 복지 인프라는 핵심 요소가 된다.
2022년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지방 청년 정착자 중 28.9%가 ‘자녀 교육 문제로 재이주를 고려’하고 있다. 특히 지방 소도시는 초등 교육 이후 대도시 진학이 필수가 되어 ‘정착이 불가능한 구조’로 이어지기도 한다.
의료 접근성, 아동 돌봄, 지역 내 이동성까지 포함된 ‘가족 단위 삶의 반복 가능성’이 설계되지 않으면, 정착은 일시적 머무름으로 바뀌게 된다.
정착은 한 번의 판단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패, 휴식, 전환이 가능해야 진짜로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지역 정착 실험은 실패하면 떠나는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임대료 부담, 사업체 폐업 비용, 공동체 내 낙인감, 재도전 기회의 부재 등 모든 요소가 ‘한 번에 성공하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동한다.
정착은 실패 후에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안전성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안전은 제도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착은 ‘남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 ‘남아도 괜찮다’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충족될 때 비로소 정착이 시작된다.
좋은 일자리는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그 외에 반복 가능한 생활, 연결된 사람, 회복 가능한 실패, 설계된 일상성까지 함께 있어야 창업도, 삶도 지역에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창업을 말하기 전에
'여기에 머물 수 있는가?'를 동시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