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옥상. 수많은 담배 연기가 가을 하늘로 흩어지고 있다.
"선배, 반타블랙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완벽한 검은색이라던데."
7년 후배인 파트너 동수. 또 시작이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에도, 보고서 쓰는 중에도, 심지어 지금처럼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온갖 잡지식을 늘어놓는 게 이 녀석의 특기다. 얼마 전엔 집단 자살을 유도한 교주들에 대해서 장장 한 달을 떠들었었다.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이제 현장 가야 하는데 진짜..."
"아니 이거 진짜 신기한 건데, 한 번 보세요."
동수가 스마트폰을 들이민다. 화면에는 정말로 현실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빛을 완전히 흡수해 버린 검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나갈 준비나 해 인마!"
동수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잠깐 스친 그 이미지가 묘하게 뇌리에 남는다. 나중에 한 번 더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오늘 현장은 작은 빌라의 반지하 가정집이었다. 자살사건.
피해자는 마흔셋의 여성. 열일곱 살 딸과 단둘이 살던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딸은 사건 당시 학교에 있었다고 한다.
어두컴컴한 조사실에 들어가니 유독 어두운 눈빛의 여학생이 앉아 있다. 두 손은 책상에 올린 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곧은 자세.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는데 도무지 얼굴을 읽기 힘들다. 여고생은 익숙지 않아서 그런가.
"학생이 이정민이지? 오늘 그... 어머니... 그분 딸 맞지?"
열일곱이라는 나이 때문인지 평소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네"
"자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할 테니 잘 대답해 주길 바라. 학생을 뭐 추궁하려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네"
"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을까?"
"참치김밥이요."
"그래. 아저씨도 좋아하는 거네. 학생도 참치김밥 좋아하고?"
"아뇨."
"그렇구나...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이따 알려줘. 아저씨가 주문해 줄게."
"네."
"혹시 어머니께서 평소에 우울증이 있으셨을까?"
"네."
"최근에 특별한 일이 있었을까? 누가 찾아오거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거나."
"아니요."
"최근 어머니께서 삶을 비관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니?"
"네."
불편해 보이는 곧은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책상 위 올려둔 손가락 역시 미세한 움직임조차 없다. 미동조차 없이 빤히 눈만 맞추고 있으니 괜한 불쾌감이 올라온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은 뭐였지?"
"어젯밤에, 잘 자라고요"
"정민 학생은 지금 많이 슬픈 걸까?"
"네"
"전혀 눈물도 안 나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대답을 하긴 하는데, 무언가 이상하다. 오늘 생을 마감한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감정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이 읽히지 않는 건 여고생이라서가 아니었나...
"야 이정민! 너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
"네"
"네. 아뇨. 네. 그것 말곤 할 말이 없어? 똑바로 협조 안 할 거야?"
"아뇨."
좀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책상을 쾅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야! 너 일주일 전부터 어머니 행적 죄다 불어. 하나도 빠짐없이!"
"네. 근데 저 목이 마르니 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하... 참나..."
감정을 끌어내 보려 큰 소리로 다그쳐봤지만, 전혀 영향이 없다. 여기 앉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그중에는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감정이 마비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보통은 미세한 떨림이나 동공의 변화, 호흡의 불규칙함이라도 있는데, 아무리 관찰해도 너무 태연하다. 오히려 감정 없는 눈동자로 나를 관찰하는 듯한 기분. 이 자리가 내게 주는 관찰자로서의 권위가 사라진 느낌이다.
아까 동수가 보여준 사진이 머리에 스친다.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검은색이라던. 그 시커먼 구멍이.
형사의 촉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 참고인 조사는 동수에게 떠넘기고 팀장을 찾는다.
"팀장님, 이거 며칠만 더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또 괜한 짓 하려고? 증거도 명백한데 뭘 더 파고들어."
"그래도... 뭔가 좀 걸려요."
"3일. 딱 3일이야."
정민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찾아갔다.
"정민이요? 음..." 담임교사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학업성취는 괜찮은 편이었어요. 지능검사 결과도 높아서 기대를 많이 한 아이였죠. 특별한 비행도 없었고요. 살갑진 않아도 선생님들을 잘 따랐어요. 우리가 뭘 하든 관심 있게 살피다 도와주기도 했고요."
"친구 관계는 어땠나요?"
"그게... 좀 특이한 일이 있긴 했어요.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갑자기 폭행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거든요. 원래 얌전한 애들이었는데 말이죠. 학폭 위원회 결과를 보면 정민이는 연루되지 않았지만, 좀 이상하긴 했죠. 그나저나 안타깝네요. 불과 5년 전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인데..."
학교 앞에서 정민의 급우들을 만났다.
"정민이요? 음... 별로 특별한 건 없는데..."
한 여학생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표정이 좀 없긴 했어요. 웃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가끔 한 번씩 관찰하듯 빤히 보는 게 약간 불편했던 정도?"
"맞아. 눈빛이 좀 싸가지가 없어요. 우리 엄마 말론 걔 아빠 없이 커서 그렇다던데."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친구를 팔꿈치로 찌른다.
"야, 그거 말하지 마..."
"왜?"
"전에 이런 말 했던 애가 정민이 걔 친구들한테 두들겨 맞았거든요..."
"뭐 어때, 걔들 다 이미 강제 전학 갔는데."
며칠 후, 사건은 자살로 종결 처리됐다.
증거는 명백했다. 사망 추정 시간에 정민은 학교에 있었고, 유서도 발견됐다. 자살에 사용된 도구는 모두 피해자 본인이 구매한 것으로 확인됐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경찰서 옥상. 왠지 모를 허탈함에 동수를 끌고 담배를 피우러 올라왔다.
"선배, 어제 TV 봤어요? FBI 사이코패스 테스트 나오던데."
"또 시작이네. 뭔데 그게."
동수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이좋은 자매가 있었대요. 어느 날 친척 장례식장에서 언니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한눈에 반한 거예요."
"그래서?"
"며칠 후에 언니가 동생을 살해했어요. 이유가 뭘 것 같아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사이코패스랑 무슨 상관인데."
"일반인들은 질투나 삼각관계 같은 걸 떠올리죠. 근데 사이코패스는 이렇게 대답한대요." 동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괴담이라도 읽어주는 투로 말한다. "장례식장을 다시 열어야 그 남자를 또 볼 수 있으니까."
"야이 씨... 그런 헛소리를 믿냐?"
"재밌잖아요. 유머 감각이 없으시네. 그러니까 여고생이나 쥐 잡듯 캐고 다니시죠."
"에휴." 담배를 비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좀 미안하긴 하더라. 정민이 걔, 아버지도 일찍 여읜 불쌍한 애던데... 내가 너무 다그쳤나 싶네."
"그러게요. 선배가 좀 심하게 몰아붙이긴 했죠. 애가 놀라면 눈물도 안 나고 반응도 없을 수 있는 건데. 그게 뭐 그리 이상하다고"
"그래. 이 동네에 사시는 할머니가 계셔서 거기로 간다지? 에휴, 그냥... 안타깝다."
사건 종결을 알리러 정민을 찾아갔다. 괜한 미안함에 근처 제과점에서 케이크도 한 조각 사 든 채로. 케이크와 함께 내 명함을 건네며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언제든 연락해. 아저씨가 큰소리 내고 그런 건 그냥 원래 그러는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말고. 힘내라."
부모 없이 자란 아내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그랬을까. 정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격려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표정 없는 검은 눈동자. 그런데 방금 찰나의 순간, 그 눈동자에 무언가가 살짝 비친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2년 후.
새로운 관할지로 온 지도 1년이 한참 넘어간다. 오늘은 자살 사건이라며 출동을 명 받았다. 다섯 명의 가출 청소년들이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집단 자살 사건. 번개탄을 피웠나 본데 세 명은 사망하고 두 명은 목숨은 건졌지만 상태가 안 좋다고 한다.
조사를 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열 명 정도 되는 가출팸 중 한 명이 재작년의 그 아이. 정민이라는 것.
참고인으로 서에 온 정민을 다시 만났다. 열아홉 살이 된 그녀는 2년 전과는 여러모로 달라 보였다.
"너 왜 여기 있어? 할머니랑 같이 사는 거 아녔니?"
순간 정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표정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던 2년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할머니께서... 어머니 떠나시고 충격을 받으셔서... 결국..."
"어쩌다가..."
"제가 문제인가 봐요. 왜... 왜 모두가 저를 떠나는 걸까요. 아저씨. 저도 잘 살아 보고 싶은데... 제가 악마의 자식인가 봐요."
내 앞에서 한참을 우는 녀석. 예상치 못한 감정 표현이 당황스러워 어깨만 두드려 준다. 잠시 후 진정된 정민에게 가출팸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집값을 아낄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무리라고 한다. 막상 가보니 정민이 어울리기엔 꽤 질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특히 자살 시도를 한 아이들은 원조교제를 하던 애들이고, 자신에게도 그걸 권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지금은 근처 복지관의 쉼터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전과 달리 협조적인 태도에 참고인 조사를 쉽게 마치고 정민을 돌려보냈다. 대체 어쩌다 할머니까지 여읜 건지 궁금해서 이전 관할지에 남아있는 동수에게 문자를 보내니 잠시 후 전화가 온다.
"네, 형. 문자 보낸 거 확인했어요. 걔도 참 다사다난하네요. 아무튼 할머니 사건 제가 이미 확인했는데요. 그것도 확실한 자살이었어요."
"뭐? 할머니도 자살이라고?"
"안 그래도 사건 당시에도, 형 얘기 생각나서 제가 좀 파봤거든요. 별문제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 증언으로는 손녀랑 사이도 좋았다던데. 근데 제가 알아보니까 자살도 유전이라던데요? 알고 계셨어요? 유전적으로..."
"야, 헛소리 좀 작작 해."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고민했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의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 이렇게 증거가 명확한 경우에는 더욱더. 사건은 또다시 자살로 종결됐다.
미안한 마음 반, 안타까운 마음 반에 다시 한번 정민을 찾아갔다. 동네 제과점에서 산 케이크를 한 조각 들고. 사건 종결 소식을 전하고, 할머니 얘기 들었다고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더니, 정민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그래. 이 어린것도 참 힘들었겠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정민의 이야기를 했다.
"너무 불쌍한 아이네. 그 나이에 혼자 남다니..."
아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그럴까? 아니면 남편 잘못 만난 죄로 자주 이사 다니느라 생긴 외로움 때문일까. 아내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내가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소개해 봐 줄래?"
정민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연락하니 흔쾌히 수락했다.
카페에서 만난 자리. 정민은 아내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뭘 그리 놀라?"
"아저씨 결혼한 줄도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분이 아저씨 부인이었다니... 대단하시네요."
아내와 정민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취미와 취향도 비슷했다. 사실 내가 보기엔 정민이가 대화를 잘 맞춰주는 느낌이었지만... 임신 7개월 차. 불러오기 시작한 배에 큰 관심을 보인 정민. 곧 태어날 아기 이야기를 하니 눈이 반짝였다.
"언니 저 아기 보러 가도 되죠? 제가 도움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요."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없진 않았지만, 이사 온 후 친구가 없어서 외로워하던 아내에게 정민은 좋은 친구가 되어줬다. 바쁘단 핑계로 집에 잘 못 들어가는 나를 대신해서 이야기 상대도 되어줬고, 만삭이 된 아내를 위해 집안일도 많이 도와줬다.
한 번씩 스치듯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아직도 섬뜩함이 있었지만, 어린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겠냐는 아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둘 다 어려서 양친을 잃은 것에 공감대가 있어서였을까. 둘은 어느 순간부터 친자매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정민이는 참 신기해. 내가 뭘 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 오늘은 냉동 망고를 사다 주더라니까? 내가 망고 얘기하면서 얼음을 먹고 있으니 그걸 캐치했더라고. 누구랑은 참 달라? 그치?"
예정일보다 이르게 양수가 터진 날, 현장에 있던 날 대신해 아내를 챙겨준 것도 정민이었다.
"정민이가 택시도 잡아주고 참치김밥도 사다 줬어. 자기랑 자기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라고. 난 못 먹으니, 당신이 대신 좀 먹어줘."
모두의 바람 속에 아이는 건강히 태어났고, 우리 셋은 왜 사람들이 아기만 바라보면 바보처럼 웃게 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웃음 지어지는 행복함. 다만 갓난아기를 보는 일은 그 행복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천사같이 사랑스럽다가도 몇 시간씩 그치지 않는 울음. 마치 불구덩이와 얼음을 오가는 것 같던 시간들. 평소에도 심약했던 아내에겐 그 담금질이 과도했던 걸까. 결국 심한 산후우울증에 빠져버렸다.
곧 있을 진급 때문에 휴가도 쉽사리 내지 못하던 못난 날 대신해서, 정민은 매일 찾아와 아내를 보살펴 주었다. 밖에서 일하다가 한 번씩 스마트폰으로 아기방 CCTV에 연결해 보면 둘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항상 대화 중이었다. 퇴근 후 아내에게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는지 물으면 가볍게 씨익 웃기만 했지만, 그 작은 웃음조차 정민의 덕인 것 같아서 그녀에 대한 고마움은 커져만 갔었다.
아이를 낳고 3개월 후.
나와 정민의 노력에도 아내의 산후우울증은 심해져만 가던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들어섰는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여보?"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고이 잠든 아기 옆으로, 아내의 상체는 침대에서 흘러 내려와 바닥에 닿아있었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자세. 입에는 거품 같은 토사물이 가득했다. 놀라서 뛰어가 맥을 짚었지만 잡히지 않았고, 곧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언제 깼는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 아이는 신경도 못 쓰고, 아내만 품에 안은 채 영겁처럼 흐르던 시간... 결국 우리 아기에게 엄마 품이라는 요람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영안실, 장례식장, 참고인 조사... 모든 게 안갯속을 지나는 것 같았다.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그것이 아내 이름으로 된 사건 파일의 결론이었다.
아내 사건의 종결 처리 후, 휴가를 내고 술독에 빠져 지냈다. 아내가 보고 싶어 결혼 앨범만 뒤적이다, 최근에는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찍어주지도 못한 내 부족함에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그나마 최근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아기방 CCTV 영상들. 아내가 아이를 돌보고, 정민과 대화를 나누던 그 모습들. 아쉬운 마음에 그것만 하루 종일 안주 삼아 틀어뒀다.
내가 길을 잃은 사이 가장 도움을 준 것도 정민이었다. 그녀는 아내가 있을 때처럼 매일 찾아와서 아기도 봐주고, 간단한 요리에 청소까지 도와줬다.
"미안해요. 오빠. 제가 언니를 더 잘 챙겨야 했는데..."
아니다. 누굴 탓하겠나. 다 내가 문제인 것을.
"참 힘드시겠어요. 저도 그랬으니까... 잘 알아요. 힘든 일 있으면 제게 얘기하세요."
주위 사람을 이런 식으로 잃는 게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 줄 몰랐다. 정민은 이런 고통을 여러 번 겪었다니. 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텅 비었었구나. 이 아이의 눈동자도. 표정도.
하루는 동수가 위로차 집에 들렀다. 오늘은 웬일로 말이 없는 녀석. 스마트폰으로 아내의 영상 보는 게 낙이라는 내 말에 CCTV 위치를 묻는다.
"형, 그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만 보지 마시고요. SD 카드에 원본이 저장되어 있을 거예요. 컴퓨터로 옮겨드릴게요. 큰 화면으로 보는 게 나을 테니까요."
"고맙다."
"그리고 빨리 돌아와요... 이러는 거 형 답지 않아."
동수가 돌아간 후, PC로 파일을 열었다. 스마트폰보다 훨씬 선명한 화질. 그리고 놀랍게도 음성까지 녹음되어 있었다. 싸구려 CCTV라 마이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첫 번째 파일. 아내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내는 계속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냉장고를 열고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채워 온다.
다음 파일. 아내와 정민이 아기를 재우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항상 보던 둘의 수다 장면이구나.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켜려다가 정민의 목소리에 놀라 멈칫한다.
"우리 엄마도 마지막 표정이 얼마나 평화로웠는데요."
엄마? 네 엄마는 자살했잖아?
"할머니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랬어요."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언니 가면 저도 따라갈게요. 아이는 오빠가 봐줄 거예요. 언니... 언니만 생각해요. 지금 너무 힘들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지?
미친 듯이 다른 파일들을 열었다.
"언니, 원래 세상은 그래요. 결국 우리는 모두 혼자예요. 솔직히 이렇게 살아서 뭐 해요."
다음 파일.
"괜찮아질 거라고요? 언니, 손목에 있는 상처 보이잖아요. 그때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 아니에요. 근데 어때요? 더 힘들어졌잖아요."
다음 파일.
"글쎄요... 여기가 이미 지옥 아닐까요? 어딜 가든 여기보다 끔찍할까요? 언니가 늘 말하잖아요.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없이 그냥 쉬고 싶다고. 맞아요. 그냥 푹 자는 거예요. 수면제 먹고 아주 깊이 잠드는 거예요. 다시는 이 끔찍한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영원히 푹 자는 거예요."
술잔이 떨어졌다.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진다.
교묘하게, 아주 교묘하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악마의 혓바닥. 그게 저기 있었구나.
동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내가 보낸 주소로 와.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말려."
"형? 무슨 일이..."
"그냥 와줘. 좀!"
전화를 끊고 정민의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보증금을 도와줘서 얻은 집. 걸어서 10분 거리다.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조심스레 열리는 문.
"어? 오빠, 무슨 일..."
나는 대답 대신 정민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정민은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진다.
"대체 뭐 하는 년이냐, 너!"
"왜... 왜 그래요, 오빠!"
놀란 표정. 그 연기가 역겹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탁자 위의 컵, 액자, 책... 정민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쓰러진 채 웅크리고 있을 뿐.
몇 분이 지났을까.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서자 정민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날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그 심연 같은 눈동자로.
"그래 맞아. 저 얼굴이야."
내가 조사실에서 나도 모르게 겁을 먹었던 바로 그 표정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다. 한참을 마주 본 채 흘러가던 침묵을 깬 것은 정민이었다.
"당신 잘못이야."
"뭐라고?"
정민이 천천히 일어선다. 그 표정은 마치 깊은 구멍 같았다. 모든 빛을 삼켜버리는 검은 구멍.
"당신이 내 손을 잡아줬잖아."
"무슨..."
"내 어깨를 두드리고, 웃어줬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미쳤어?"
"케이크를 사다 주고, 위로해 줬잖아."
정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 잘못이라니. 대체 무엇이 말인가... 나 때문이라고? 내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게? 내 잘못이라고? 자신이 절망으로 유혹해 놓고서? 내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동수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도착했을 때, 나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정민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깊은 구멍처럼 뚫려있는 눈동자로.
"난 그저..."
정민이 말을 잇는다.
"한 번 더 내게 웃어주고, 한 번 더 날 안아주길 바랐을 뿐이야. 그게 다였어."
동수가 상황을 파악하고 정민에게 다가갔다. 나는 파출소 순경에게 부축을 받아서야 겨우 그 검은 눈동자 앞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달 후. 그 녀석의 정신감정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흔히 말하는 사이코패스로, PCL-R 점수도 매우 높게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간 주위에서 벌어진 자살 사건들에 대해 교사나 방조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아직 미성년자라서 조사는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제출한 CCTV 음성 녹음만으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녀석은 결국 증거불충분, 흔히 말하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동수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반타블랙 아세요?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완벽한 검은색이래요."
그 녀석의 눈이, 표정이 그랬다. 세상의 그 무엇도 비춰지지 않던 모습.
그 녀석에겐 대체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감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악의로 가득 찼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내 작은 위로, 그것 하나만을 바랐던 걸까. 아니. 절대 아니다. 그 녀석에게는 분명 그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나도. 세상도.
아마, 자기 자신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