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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과 관람사이

by 솔라담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과연 우리는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일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는 것보다, 난민, 노숙자 그리고 재소자등 우리 사회의 이웃을 사랑하는 게 예수님 가르침의 진정한 실행이 아닐까."

엔터.

다 썼다! 지난 몇 달간 쓴 칼럼 시리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의 마지막 원고까지 퇴고를 마쳤다. 해방이다!

노트북을 덮으며 허리를 한 번 펴고 목을 좌우로 풀어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 하늘. 유독 구름이 많은 날이라 그럴까. 하얀 솜에 보랏빛, 분홍빛 물감을 기묘하게 뿌린 듯한 하늘 위 캔버스에 시선을 뺏긴다. 예전에 갔던 '모네전'이 떠오른다. 딸아이와 처음 갔던 전시였는데. '석양에 물든 센강'이었나. 허기가 느껴져 생각해 보니, 점심 식사 후 커피 한잔 들고 들어와서 지금까지 앉아있었다. 해를 맨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까지.

셀러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낸다. 원래는 아르헨티나 말벡을 생각했었는데, 모네가 마음에 들어온 김에 프랑스 와인을 꺼내 들었다. 몇 년 전, 저명한 문학지에서 평론 부분 수상을 한 날 기념으로 받은 와인. 같이 받은 트로피는 거실장 한가운데와 내 자부심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꽤 오랜 기간 아낀지라 손이 머뭇거렸지만, 이번 시리즈의 좋은 결과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소믈리에 나이프를 가져다 댄다. '뻥'. 코르크가 열리는 소리가 마치 이번 칼럼의 성공을 미리 축하해 주는 듯 경쾌하다.

노을과 와인의 색을 즐기고 있는데, 중학생인 딸이 귀가했다. '내 작은 사랑이 어느새 내 자랑으로 자람.' 같은 되도 않는 말장난을 되뇌며 혼자 웃음 짓고 있으니 딸이 묻는다.

"나 왔어. 아빠! 무슨 좋은 일 있어? 왜 혼자 웃고 있어?"

"어, 아빠 쓰던 글 마무리해서. 한동안 우리 딸이랑 또 미술관도 다니고 시간 보낼 수 있겠다."

"난민이랑 노숙자 얘기하던 그거...? 그나저나 아빠 나 이제 초등학생 아니야. 미술관 다닐 시간 없어."
씁쓸한 웃음으로 피곤하단 표정을 짓는 딸. 다만 그 목소리에는 다른 고민이 녹아있음이 느껴진다.

"시간이야 잠깐씩 엄마 몰래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니. 미술관도 바로 집 앞이니.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면 오늘 퇴고한 원고 한번 봐줄래?"

"이따가 볼게."
소파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쉰다. 이따가의 의미는 알고 있다. 집사람이 차는 좀 이따가 바꾸자고 한 게 이미 10년 전. 두 여자는 얼굴도 말버릇도 닮았다.

"근데 아빠. 얼마 전 학교 토론수업이 있었는데, 내 친구들은 난민이니 재소자니 별로 관심 없더라. 오히려 불만이 많더라고."

"불만? 무슨 불만?"

"그냥. 우리 살기도 힘든데 왜 남을 도와야 하냐고. 우리 세대는 취업도 힘들다고 하고, 몇 년을 일해도 집 한 채 못 산다고 하니까."

순간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설교자 인격의 일장연설. '요즘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느니, 화면 너머 타인의 실존을 인식하지 못한다느니'. 와인 한 모금의 도움을 받아 겨우 설교자 인격의 개탄을 억누르고 되묻는다.

"그래도 세상엔 항상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들이 있는 거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걸 나눌 줄 알아야 하는 거고. 그게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 아닐까?"

"아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니까 그렇지."
별거 아닌 딸의 말에 가슴 한가운데가 저릿하다. 왜일까. 해외 의료봉사, 연탄배달, 요양원 봉사 등 나눔의 가치를 지키려고 애를 써왔다. 그럼에도 딸아이의 말이 바늘처럼 박힌 이유는 무엇일까.

“정은이네 아버지 교통사고 당한 거 얘기했나? 음주운전 사고인데, 그 가해자가 걔네 집 협박 중이래. 왜 합의 안 해주냐며.”
정은이. 딸의 단짝 친구다. 우리 집에도 몇 번 놀러 온 사슴같이 눈이 깊던 아이. 그 맑은 눈동자가 공포에 젖어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또 욱신거린다.

"협박을 한다고?"

"어. 범인은 지금 구치소에 있나 본데 이상한 편지도 보내고, 온몸에 문신한 사람들도 찾아오고 그러나 봐."

"뭐라고? 이 동네에 그런 놈들이 찾아온다고?"

"여기서 동네가 뭔 상관인데 대체! 그러니까 맨날 구경만 하는 사람 같단 거야!"
딸아이가 방으로 들어간다. 문 밖에 남겨진 ‘쾅’ 소리와 아이의 짜증이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다.

와인잔을 내려놓는다. 입에 감도는 씁쓸함. 탄닌 때문일까? 와인 보관을 잘못해서 맛이 변했나? 괜히 멀쩡한 와인셀러를 노려보다가 한숨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간다. 창 밖은 어느새 짙은 어둠에 끈적하니 젖어있었다.




다음 날. 기분전환을 위해 미술관으로 향한다. 기다리던 새로운 전시. 한국에서 고흐와 까라바조의 전시회를 동시에 볼 수 있다니. 배낭여행으로 갔던 오르셰와 신혼여행으로 간 우피치에서 느꼈던 그 벅찬 감동. 이제는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뿌듯한 웃음이 나온다.

언론에서도 조명된 전시라서 그런지 입구부터 북적북적하다. 평일에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삶이라니. 지난 몇 달간 허리와 어깨가 휘어라 앉아만 있었으니 이 정도 사치는 부려 마땅하지 않을까. 영감을 찾고 위안을 느낄 수 있는 공간. 티켓을 끊고 어두운 문을 지나 입장한다. 16세기 이탈리아와 19세기 프랑스를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으로.

1층에서 프랑스, 2층에서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끝내고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다. 창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스쳐간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은 아마 오늘 전시나 공연을 보러 온 거겠지.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은 근처의 직장인일 것이고.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투명한 창 하나 너머로 마주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 조금 전까지 관람한 작품들을 되새긴다. 아를의 포도밭부터 탄광촌의 감자 먹는 사람들. 오늘 본 고흐의 그림 속에는 허리를 숙이고 있는 인물이 더 많았다. 이름 모를 프랑스의 노동자들. 그리고 까라바조가 성녀의 모델 삼아 그린 이름 모를 매춘부.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위대한 예술 속에서 영원할 수 있음을 알았을까.

각자 세상의 어두운 곳의 모습을, 영원한 빛과 안식으로 승화시킨 두 불행한 화가. 이 두 명장이 정신이 불안정한 알코올중독자나 뒷골목의 건달로 끝나지 않고, 인류에게 크나큰 선물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도움과 나눔 덕분이었다. 그들의 초라함을 멸시하지 않고, 그 안에 작게 불타던 불씨를 살려내 준 주위의 사람들. 우리에게 해바라기와 바커스를 남겨준 것은 두 명장뿐만이 아닌 그 주변 사람들의 역할도 분명 있는 것이다. 그래. 바로 그게 우리가 이웃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다. 커피의 따뜻함 때문일까. 어느새 가슴의 욱신거림이 스르르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인터뷰 칼럼 원고를 청탁받아, 한 유명 건축가를 만나게 되었다. 여러 대학의 건물을 설계한, 업계에선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건축 쪽은 조예가 없어서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젊어서 빈민촌 철거 반대 운동을 했다거나, 효율만 따지던 그 시기에도 사회적 약자의 이동권을 신경 쓴 건축을 했다는 점에는 큰 감명을 받기까지 했다. 최근은 고령으로 파킨슨 병이 심해져서 딸의 집에 요양 중이라는 건축가. 그의 거처는 뉴스에서 몇 번 본, 한강뷰로 유명한 고가의 아파트였다.

"어서 오세요. 작가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눈썹까지 하얗게 샌 건축가분께서 반갑게 맞아준다. 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걸음은 힘겹지만 눈빛만큼은 젊은 시절의 기세가 느껴질 만큼 맑고 강렬하다. 집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라며 내 손을 이끈 곳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신과 인간이 합작을 한 거대한 캔버스가.

"안녕하세요. 건축가님. 최근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 감명 깊게 봤습니다. 편집장에게 들으셨죠? 해당 내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감히 청해보려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그의 철학, 그의 신념. 그리고 그걸 실천해 낸 점까지.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존경심이 자라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되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그의 건축가적 견해는 너무나도 또렷해서, 이 주장만 전 국민이 듣는다면 지긋지긋한 시위도, 시민들의 불평도 끝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건축가님의 권유를 이기지 못해 간단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창 밖의 캔버스는 어느새, 별빛과 테일라이트가 강물에 넘실거리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멋지죠?"
건축가님이 웃으며 묻는다. 감탄한 표정이 너무 드러났던 걸까. 괜한 민망함에 등골에 땀이 끈적하다.

"사실 내가 전원주택에 살았었거든요. 그런데 몸이 아프고 나니 외출도 힘들고, 병원 한번 가기 너무 힘들더라고. 요즘은 택시도 잡을 수가 없으니 말이야."
하긴. 사실 어플로 택시 부르는 건 나도 익숙지 못해서 아직도 아내에게 부탁하고 있다.

"그래서 우울증이 왔었는데 말이야. 여기 와서 이 경치를 보고 있으니까 몇 달 만에 그 우울증이 다 나았어."

"정말 다행이시네요. 제가 봐도 아름답습니다. 신이 내린 한강의 아름다움에 인간이 조형한 도시건축까지. 건축가님의 눈엔 더욱 그러시겠네요."

"그래요. 맞아. 난 말이에요. 우리나라 아픈 사람들 다 여기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 경치 보고 말이야.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몰라요. 삶의 여유도 생기고요."

"그러게요. 건축가님. 그런데 여기 집값이 보통 사람들이 살기엔... 하하."
뉴스에서 본 가격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살짝 나왔다.

"아뇨. 전세는 살 만해요. 작가님도 이사 오세요."
순간, 묘하다. 뭔지 모를 위화감. 가슴 속 한가운데가 간질거린다. 건축가님의 눈빛은 여전히 또렷하다. 이 분의 표정에 우월감이나 오만은 보이진 않는다. 이 분의 삶의 행적에서도 교만이나 선민의식을 찾을 순 없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과 건축을 논하던 그 또렷한 눈빛은, 대한민국 최고가의 아파트가 전세는 살만하다는 말씀을 하실 때도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소파에 앉아 창 밖 경치를 바라본다. 처음 분양받았을 때 집사람과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다. 창밖으로 뻥 뚫린 경치를 보라고, 분명 프리미엄이 붙을 경치라면서. 집 앞에 7층짜리 상가가 들어온단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13층임에 걱정이 없었다. 다만 상가의 높이는 아파트와 다르단 것을 그땐 몰랐었다. 결국 상가에 절반이 가로막혀버린 창밖 풍경. 그래도 전체가 가리지 않은 게 어디냐며 위안을 삼았었다. 경치가 아쉽다고 마음에 그늘이 생기진 않았었다.


오늘은 분명 좋은 경치에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받고, 존경할만한 분과 만족할만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우리 집 창 밖에 짙은 그늘이 져 있는 건 왜일까.

어느새 열한 시경. 학원을 마친 딸이 도착했다. 딸은 방에 가방을 두고 나와서 내게 말을 붙인다.

"아빠, 정은이 오늘 학교도 못 나왔다?"

"왜?"

"그 가해자 측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서. 걔네 엄마가 경찰을 몇 번 불렀는데도 계속 오나 봐."

"아니 경찰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문 앞으로 찾아간 것도 아니고 주위에서 돌아다니는 정도로는 범죄가 성립하지도 않나 봐."
딸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아빠. 난 아빠 말 다 이해해. 저번에 쏘아붙인 것도 미안하고. 그런데 가끔 한 번씩은 아빠가 허황된 얘기하는 것 같아. 채리네 집은 얼마 전에 코인사기로 돈 많이 날렸다고 하더라. 그리고 옆동네엔 성범죄자 알림이 우편물 왔다고 난리 났었어. 그런 사람들도 보듬어 주자는 건 알겠는데, 바로 옆에서 부대끼고 사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할 것 같아."

"그래. 고맙다 우리 딸.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얼른 씻고 나와. 아빠가 간식 준비하고 있을게."

아. 그 감정이 이거였구나. 건축가님의 집에서 느꼈던 그 위화감. 그 감정이 되살아난다. 난 결국 한걸음 뒤에서 관조만 했었구나. 카페의 창 밖으로, 미술관의 캔버스 너머로, 뉴스의 화면을 통해, 잡지의 활자 건너로. 이상을 외치고 타인의 고통을 연민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현실에 내 연민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거실장의 은빛 트로피 옆, 나무 조각상으로 눈이 간다. 15년 전 케냐 공항에서 사 온 마사이족의 사자 조각상이다. 친분 있는 치과의사분의 통역으로 동행했던 의료봉사였다. 봉사를 떠나기 전 한국에서 했던 미팅. 가서 식사할 준비를 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통조림을 몇 개를 챙길지, 햇반을 어떻게 가져갈지 등등의 얘기를 나누던 순간. 아마 어렸기 때문이겠지. '의사들이라 그런가, 되게 깐깐하네.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에 이런 말을 내뱉었었다.

"매니저님. 저는 그냥 현지에서 현지식 먹겠습니다."

미안한 듯. 혹은 다른 말을 삼키는 듯, 오묘했던 표정의 매니저님. 그의 답변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죄송한데... 선생님, 현지에는 음식이 없습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내 어리석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케냐 국경 근방의 시골마을. 무장단체의 위협으로 구호단체의 방문도 드문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외국인, 그중에서도 동양인은 처음 봐서 더 그랬겠지. 그 근방의 모든 아이들은 우리 캠프로 찾아와서 우리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또 한 번 한심한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매니저님. 얘들은 집에 안 가나요? 배고플 것 같은데."

매니저님은 다시 한번 그 오묘한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여기는 보통 하루 한 끼도 겨우 먹어서요. 아마 집에 가도 먹을 게 없을 거예요."

아프리카의 더위 속에서도 후끈함이 느껴지도록 달아오른 얼굴. 썩은 물인 줄 알았던 캠프 구석 오수를 마시던 아이들. 문을 닫을 시간이라 돌려보내려니 아침 7시에 출발했다고 사정하던 십 대 아이. 그날 밤 먹은 참치캔과 햇반은 유난히 맛있어서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얼굴 벌게지도록 창피했던 기억까지도.

딸아이의 간식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난다. 소파에 닿아있던 등이 젖어있었는지, 쩌어억하고 가죽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땀 때문일까? 아니면 내 끈적이는 부끄러움 탓일까...


답답한 마음에 아이가 남긴 간식을 안주삼아 일전의 와인을 마신다. 오늘도 역시나 떫다. 나는 무엇을 했던 걸까. 선의라는 핑계를 뒤집어쓴 채 사실상 방관을 했던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내 글의 소재를 관찰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 그 정도면 사실 관람이라고 비판받아도 변명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상념 속에 시간은 세시가 되었다.

새벽 세시. 밤과 아침사이 그 어딘가. 문득 지금 나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무지와 자각 사이.
위선과 진심 사이.
그때와 지금 사이.

창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구급차일까, 경찰차일까. 가깝게 들리는데 혹시 나가 보는 게 나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이 늦은 시간에도 위험에 빠진 사람이 있다. 폭력에 시달리거나 생사를 다투고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뱉었던 말. '이 동네에도 그런 놈들이 온다고?' 그 말은 얼마나 한심하고 폭력적인 걸까. 그딴 말을 내뱉은 주제에 '작가님도 이사 오세요.'라는 말에 흔들렸었다니.

책상 위 놓인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원고가 갑자기 너무나도 가벼워 보인다. 사실 나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몰랐었구나. 15년 전 아프리카에서부터, 오늘 이 서재까지. 나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지지 못했다.

잠깐 들었던 점퍼를 내려둔 후, 볼펜을 들고 다음 원고의 제목을 메모한다. '소외되지 않았기에 더욱 소외된 이웃을 위하여.'

창밖으로 아까 들렸던 사이렌 소리의 흔적을 찾아본다.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마 앞의 상가에 가려있을지도. 창밖 상가의 끈적한 그늘이 유독 어두워 보인다.






*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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