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자데 (Vuja De):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는 현상.
'위이이이이이이이잉'
제기랄. 사이렌 소리. 또 시작이다. 저 빌어먹을 괴뢰군 새끼들이 또 내려온 모양이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바로 뛰어나가서 대문을 잠그고 들어와 바닥 장판을 열어젖힌다.
'쩌어억.'
불과 얼마 전에도 숨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장판은 끈적하니 붙어있었다. 장판 밑 구들장을 열고, 들어갈 준비를 한다. 이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일종의 비밀 참호다. 이번엔 또 며칠이나 숨어있어야 할까. 진짜 지겨울 노릇이다. 저 빌어먹을 괴뢰군 새끼들. 그때 내가 전부 씨를 말렸어야 했는데...
난 함경도 북청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느 날부터였을까. 청년들이 군인에게 잡혀갔단 소식이 들려오고, 불길한 소문도 돌기 시작했다. 마을 어른들은 우리에게 산속에 숨어있으라고 하셨다.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라 마음이 불편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부모님께 저녁에 돌아오겠단 인사를 드리고, 만들어주신 감자떡을 챙겨서 산에 올라갔었다.
그날따라 빨갱이새끼들은 우릴 잡겠다고 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개 짖는 소리에 쫓겨, 길도 제대로 모른 채 시작된 도피. 남쪽으로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계곡을 건너. 빨갱이 새끼들을 피해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새 삼팔선을 한참 넘어왔었나 보다. 어느새 무더위가 끝나고 새벽이 추워질 무렵. 하루는 너무 허기져서 구걸이라도 하러 민가에 내려갔다가, 그렇게 도망 다니던 군인들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남쪽의 군인들에게. 그리 죽어라 도망 다녔는데 결국 징집을 당하다니. '차라리 고향에서 잡혀갈걸'이라는 허탈함이 어찌나 컸는지 모른다.
끌려간 곳에서의 고생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북에서 내려왔단 소리에 며칠간 고문에 가까운 구타를 당했었다. 아니다! 나 빨갱이 아니다! 나는 빨갱이 새끼들 피해서 도망 온 거다. 그 새끼들 때문에 내가 부모님이랑 생이별을 한 상태인데 왜 그러느냐. 제발 살려달라. 간곡한 부탁에도 어찌나 두드려 맞았는지. 그놈들이 왜 그렇게까지 내게 잔인했는지는 얼마 후에나 알 수 있었다. 내가 산속에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결국 빨갱이 딱지를 제대로 떼지 못한 나는 당시 가장 험지라 여겨지던 빨치산 소탕부대로 투입되었다.
빌어먹을 빨치산 놈들. 정말 지겹도록 이어지던 전투들. 어디에 그렇게 숨어있는 건지. 낮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들이 밤이면 내려와서 민가를 약탈하거나 우리를 공격했다.
'위이이잉'
야습은 사이렌과 함께 찾아온다. '퓨웅, 퓨웅'.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총알. 그놈에겐 눈이 없었고, 죽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 어둠 속에서 안 보이는 거야 서로 마찬가지라지만, 놈들은 우리 위치를 알고 공격을 했고, 우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야습을 당한 날. 벼락보다 컸던 어둠 속의 총성과, 머릿속을 후벼 파는 사이렌 소리. 겁에 질려서 하이바를 부여잡고 벌벌 떨던 나를 달래준 건 평양 출신 박상사였다. 항상 날 챙겨주던 고마운 사람. 그때도 괜찮다고, 걱정 말라며 내 손을 꽉 잡아 줬었다. 두터운 거친 손으로. 총성과 사이렌이 멎을 때까지. 상황이 끝난 후 횃불을 든 병사들이 인원파악을 위해 돌아다녔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옆을 보니 박상사의 머리는 반쪽이 날아가있었다.
연합군이 괴뢰군을 몰아낸 지는 이미 오래. 애진작 보급로가 끊긴 놈들은 근처 마을을 약탈하며 버텼지만, 놈들의 저항도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는 운 좋게 놈들이 숨어있던 곳을 찾아내서, 잔당무리를 싸그리 쓸어버렸다. 마대자루에 녀석들 대가리를 따 넣고 산을 내려오다가 마을 사람들과 마주쳤었다. 선지가 흥건한 마대를 보고 놀라던 사람들. 멧돼지 사냥을 했다고 둘러댔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우릴 보던 그들의 눈빛까지도.
'위이이잉'
마지막 발악이었을까. 바짝 독이 오른 북괴군 새끼들의 야습. 눈먼 총알에 다리를 뚫려버린 그날 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서일까. 다리엔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난 강제 전역을 피할 수 없었다. 아직은 고향에도 갈 수 없고, 딱히 갈만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작전중에 몇 번 들러서 얼굴이라도 익히고 지내던, 지리산 산골 마을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괴뢰군 새끼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알았는지 한 번씩 저렇게 마을로 찾아오곤 한다. 아마도 복수를 위해서겠지. 내가 딴 괴뢰군 새끼들 모가지가 제무씨 한 트럭은 채울 테니까.
이 새끼들이 찾아올 때마다, 이장은 날 위해 사이렌을 울려준다. 그래서 망정이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녀석들에게 잡힐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대체 군복은 언제 바꾼 건지. 써글롬의 자식들. 그때 전부 싸그리 쏴 죽여 씨를 말렸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급하게 쪼꼬레또만 한주먹을 챙겨서 구들장 밑 참호로 들어간다.
매캐한 먼지가 폐부를 찌른다. 육시랄. 총알을 맞은 다리가 쑤신다. 생각해 보니 내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다. 식칼이라도 들고 문 뒤에 숨어있다가 들어오는 빨갱이 새끼 목이라도 따고 그냥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내버릴까? 아니다. 그래도 몇 년을 못 본 어마이... 우리 어마이 다시 만날 생각 하면, 그래도 살아있어야 한다. 보고 싶다. 오늘따라.
"어이 김 씨! 김 씨! 나오라고! 괴뢰군들 갔어! 갔으니까 나와!!! 막걸리 사 왔으니 나오라고!!!"
지리산 어귀, 평화로운 산골마을. 목청 높여 외치고 있는 건 박 씨 영감이다. 북청에서 온 외지인 김 씨를 가장 잘 챙겨준 사람. 사이렌 소리에 놀랐을 김 씨가 걱정이 되어 찾아왔다.
"콜록, 콜록"
목이 아픈지 연신 기침을 내뱉는 박 씨 영감. 옆에 있던 황 씨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박 씨에게 말을 건넨다.
"뭐, 어쩔 수 없잖나. 이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지금 몇십 년째 민방위날마다 저러니... 어쩌겠나. 이틀만 기다리면 나올 테니 그냥 기다리세."
털레 털레 돌아가는 두 영감. 그 옆으로 마을 아이들이 강아지 뒤를 쫓아 뛰어다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화투장 내려치는 소리, 막걸리잔 부딪히는 소리. 담벼락 너머 세상은 눈치도 없이 수다스럽다. 구들장 밑의 전쟁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