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

by 솔라담



으하하하! 백 년의 원한 끝에 내가 돌아왔다! 네놈이 내 가슴에 납탄을 박아 넣기 전에 내가 한 말! 네 혈육을 반드시 갈아 마셔버리겠단 그 말. 그걸 지키러 저승에서 돌아왔다. 복수귀로 백 년을 갈고닦아 이제 인간에게 빙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백 년간 찾아둔 네 유일한 혈육. 그 녀석의 목숨을 내가 받아가겠다. 으하하하하!




육시럴... 빙의를 한 첫날부터 말썽이다. 혼령으로 살아온 탓에 인간의 몸을 움직이는 법이 기억나지 않는다. 몸의 주인은 분명 건장한 녀석인데도, 팔 하나 다리 하나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다. 방금 전까지 생각만 하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었으니, 몸을 움직이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 전혀 잊고 있었구나... 그리고 살아있을 적 내 키가 작아서 그랬는지 무턱대고 큰 몸을 택한 게 더 문제다. 안 그래도 움직이기 힘든데, 손가락을 움직이려니 손목이 움직이고 지랄이다. 젠장. 그래도 내가 해내고야 만다. 백 년을 참았거늘...


몇 시간 후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자유롭진 못하다. 빌어먹을... 인간의 몸에서는 오물이 나오던 걸 잊고 있었다. 닦아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래도 변소에 물이 고여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배가 너무 고프다. 얼마 만에 느끼는 허기인가. 식탁 위, 몸의 주인이 먹다 남긴 음식을 입에 넣는다. 보기엔 꿩이나 오리 같은데 좀 작다. 육시럴... 빌어먹을 맛이다. 복수고 나발이고 순간 뇌가 멈춰버렸다. 시래기에 무짠지만 알던 내 세계에 쩍 하고 금이 가버린 것이다.


한동안 집에 있는 음식들을 탐했다. 분명 사람들 사는 모습을 충분히 관찰했다고 생각했는데, 화구에 불을 켜거나 깡통을 여는 건 얼핏 본 것만으로는 따라 하기 어렵더라. 참치라는 놈 하나 따는데 몇 시간을 고생했다. 겨우 따긴 했지만 피가 철철 나는 손톱 밑이 어찌나 욱신거리는지. 이 몸의 주인에게 참말로 미안한 노릇이다. 그런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깡통 속 물고기나 돼지고기가 어찌 이렇게나 맛있을까. 심지어 그 귀하던 흰쌀밥. 하얀 쌀이 창고에 넘쳐난다. 분명 복수만 하고 돌아가려고 했거늘...


오늘은 티브이란 것을 켜보았다. 뭐가 쉴 새 없이 나온다. 정말 하루 종일 끊임없이 나온다. 웃긴 건 분명 우리말인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더라. 그래도 움직이는 그림만 봐도 즐거웠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왜정시절을 다룬 이야기도 나오더라. 그 시절 경성의 화려한 모습이라니. 분명 내가 살던 시기지만 같은 시대가 맞나 싶다. 나의 세계는 치욕적이었으니까. 신기한 건 분명 현세를 관찰할 때는 저 티브이라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복수귀여서 그랬을까? 지금은 인간의 몸에 빙의를 한 상태라 다른 걸까? 티브이 속 남정네가 가면을 쓰고 왜놈들을 물리치는 모습을 한창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다. 가슴속 납탄은 애진작 사라졌거늘. 왜 가슴이 이리 묵직한지... 이야기가 끝나니 어느새 목 옷깃까지 흠뻑 젖어있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어매가 왜놈 손에 가셨던 날 이후니 백 년은 넘었구나.


그 후로 며칠을 티브이만 보고 있었다. 아까 본 티브이에선 궐련을 끊어야 한다고 뭐 작심삼일이니 하던데. 궐련 한 개비 얻어 피우겠다고 굽신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몸의 주인이 티브이 위에 붙여둔 '금연!!'이 뭔가 했더니 그 얘기였다. 참말로. 그 귀한 걸 끊으니 마니... 세상이 달라지긴 했구나.


어느새 서랍과 빙고에 든 음식을 다 먹었다. 분명 이승을 관찰할 때 지폐를 사용하는 걸 봤는데, 이 집 안에는 아무리 찾아도 종이돈이 없더라. 결국 동전이 가득한 통을 들고 가까운 가게에 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니, 계집애가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한다. 뭘 보고만 있느냐고 언성을 높이니 미친놈 취급하며 소리를 지르길래 놀라서 자리를 떴다. 세상이 바뀐 걸 알고는 있었지만 계집에게 엄한 소리를 들으니 속이 참 쓰리다. 한참을 헤매다 지나가던 할멈을 붙잡고 배가 고프니 도와달라 하여, 겨우 음식을 구했다. 게다가 내 말씨가 자기 아바이 같다며 내게 식사도 한 끼 사주었다. 튀긴 꿩이 먹고 싶다 하니 웃으며 치킨이라는 걸 사줬는데, 내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갓 튀긴 치킨이라는 놈에게...


오늘은 하늘 끝까지 닿은 것 같은 건물 꼭대기를 올라가 봤다. 내 기억 속 가장 높은 곳은 뒷산 꼭대기였는데, 비교도 안되게 높더라. 이미 복수귀일 적 본 지라 알고는 있었지만, 인간의 눈으로 본 세상은 무지하게도 넓었다. 티브이에서 온갖 요상한 것들을 보고, 깡통료리와 치킨이란 녀석을 맛보고. 지나가는 이에게 얻어 피운 궐련의 환상적인 맛. 이상한 옷과 노란 머리의 사람들. 번쩍번쩍거리며 달리는 구르마. 하늘 끝에 닿은 건물들.


아니다. 여긴 아니다.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그 누구도 왜놈들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다. 그 누구도 왜놈을 욕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랏님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다. 여긴 다른 세상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시절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내가 죽이려고 했던 그 빌어먹을 놈의 자손도 그놈과는 다른 사람이다. 다른 세상의 다른 사람이다. 여기에 내 한을 풀어 무엇하랴.


복수귀 시절의 내게 이 말을 한다면 분명 '이 자식아! 작심삼일인 거 아니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네 한을 떠올려라!'라고 나무랄 것이다. 그때의 내게 미안하다. 그래도 어쩌랴. 아닌 건 아닌 것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잊어야 할 건 잊는 게 맞다.


사실 어제 그 육시럴 놈의 손자를 찾아갔었다. 스무 살이나 됐나. 울상으로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걸 따라다니다 보니 술 한잔하고 취해서 나자빠지더라. 녀석의 집은 알아뒀던지라 부축해서 데려다주는데, 술이 잔뜩 돼서 중얼거리는 꼴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뭐 널 잊고 싶은데 그게 안되느니, 네게 전화 안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삼일 만에 또 전화했느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느니. 참나. 남자가 되어갖고... 이 한심한 놈을 죽여서 뭐 할꼬... 싶더라.


돌이켜보니 인간세계로 간 복수귀 중에서 성공하고 오는 놈이 거의 없었다. 이제 알겠다. 녀석들 원한의 세상도 이미 지나가버려서 그랬구나. 나도 이대로 돌아가면 순서를 기다리는 녀석들에게 온갖 비난을 듣겠지. 기회를 날려 먹은 한심한 놈이라고. 뭐, 어쩔 수 없다. 그냥 '가보고 말해라. 이놈들아!'라고 웃어주고 저승으로 가는 수밖에.


이승을 떠나기 전, 그간 신세 졌던 집을 둘러본다. 티브이 위, '금연!!'이라고 붙여둔 종이에 눈이 멈춘다. 미안하다. 피워버렸다. 그래도 몇 개비뿐이니 용서해 줘라. 이번엔 꼭 금연하길 바란다. 작심삼일 하지 말고. 정말 고마웠다. 몸의 주인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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