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은 언제 피어나는지요?
겨울 점퍼를 맡기려 주머니를 뒤적일 무렵인가요? 점순이가 봄감자로 유혹하는 동백꽃 필 무렵인가요? 아니면 '봄바람 휘날리며'를 흥얼거리는 순간일까요.
제게 봄의 시작은 매화향이 은은하게 바람결에 느껴지는 순간이랍니다.
그 향기는 언제나 저도 모르게 찾아옵니다. 아직 찬 기운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이월의 끝자락, 혹은 삼월의 초입. 바쁜 걸음도 문득 멈춰 서게 만드는 그 향. 눈을 감고 깊이 들이마시면, 어딘가에서 작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화. 그토록 작은, 손톱만 한 꽃 하나하나가 예로부터 지조와 고결함을 상징할 수 있었던 것은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는 강인함 때문이라 합니다. 하지만 제게 매화의 고귀함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매년, 한 번도 빠짐없이 제게 찾아와 자신의 향으로 봄을 알려준다는 것. 볼 수 없어도, 만질 수 없어도, 그저 향기만으로 존재를 알리는 그 은은한 감사함 말입니다.
봄은 어찌나 짧은지. 은은한 매화향에 취해있다 보면 어느새 프리지아향이 피어나더군요. 그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기는, 제 첫사랑 그녀가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를 피어오르게 합니다.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
그녀에게 제 향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그런 연인이었길 바라지만... 이제 와서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의 프리지아는 제가 사랑하는 꽃이지만, 봄의 끝 향기가 풍겨서 눈물이 나기도 한답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그 아이러니가, 어쩌면 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향수병이 일어날 것 같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벚꽃비 사이를 내달리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 품 안에서 말 한마디로 세상을 호령했던 사랑방의 따뜻함. 인생을 내다 바칠 것만 같던 첫사랑, 그녀의 코를 찌르던 살내음.
그 모든 순간이 내겐 봄과 같습니다.
봄은 아름다워서 짧은 걸까요, 혹은 짧아서 아름다운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 짧은 순간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찰나를 되돌아 봄'.
이것이 제 모든 순간의 소원이랍니다.
봄의 새 학기. 봄꽃이 유독 아름답던 교정.
그해 봄의 드레스는 유난히 화려했습니다. 캠퍼스를 가득 메운 매화나무,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워 올렸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이 반짝이는 비즈처럼 흩날렸습니다. 신입생들의 설렘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봄의 교정은 화사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하얗고 빨간 꽃잎들로 치장한 교정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유독 제 마음엔 그녀가 만개해 버렸습니다.
처음 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그녀. 흩날리는 작은 꽃잎이 그녀의 어깨에,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줄도 모르고 글의 세계에 들어가 있던 모습. 한 폭의 그림 같다는 표현이 얼마나 진부한지, 제 자신의 부족한 감수성이 지독하게 얄밉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의 일기장에 애써 묘사했던 그 순간이 기억납니다.
'난 오늘, 움튼 새싹과 다시 흐르는 시냇물, 녹기 시작한 대지의 향기를 봄.'
그렇게 반해버린 저는 벌이나 나비 마냥 그녀만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첫 MT날. 몇 명씩 무리 지어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던 통나무 펜션. 나는 그녀와 다른 무리에 속해 아쉽게도 등을 마주한 채 앉아있었습니다. 제 앞의 선배들이 알려주던 학교생활 조언은 듣지도 않고 뒷자리 그녀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보고 싶다던 영화. 제목조차 모르던 영화였지만, 저도 모르게 꼭 보고 싶다고, 같이 보자고 외쳐버린 저. 모두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집중되었고, 얼굴이 빨개진 그녀가 못 이긴 척 작게 끄덕인 순간 제 인생의 겨울눈이 펑하고 터진 것 같았습니다.
4월 16일. 첫 데이트.
그날따라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거리엔 봄의 연인들이 만발했습니다. 함께 본 영화는 사실 내용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두 시간 내내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바빴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누군가 제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그 영화를 대답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찾아간 놀이공원. 회전목마를 타며 그녀가 웃던 모습, 관람차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보다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눈빛. 평생 키우겠다며 사 온 튤립 모종은 결국 제 무지를 비웃듯 일주일 만에 시들어버렸지만, 그녀는 그런 저를 보며 그저 웃어주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녹음처럼 짙어졌고, 어느새 물들고, 떨어지고, 쌓이고, 녹듯 흘러갔습니다.
초여름, 그녀에게 꽃길을 선물한다고 학교 장미 꽃잎을 따다가 경비원 아저씨께 걸려 혼났던 날. 그녀는 제가 주머니에서 꺼낸 구겨진 꽃잎 몇 장을 보고는 한참을 웃었고, 그 웃음소리는 손안에 남은 장미향보다 달콤했습니다.
한여름 밤, 푸르른 바다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 후, 처음으로 크게 다투었던 그날. 사소한 일이었지만 서로의 자존심이 부딪혔고, 파도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메웠습니다. 말은 못 했지만 싸우는 동안 모기에 온몸을 뜯겨 얼마나 간지러웠는지. 고집스럽게 등을 돌리고 있었던 우리는, 새벽녘에야 손을 다시 포갰고 서로의 모기 물린 자국을 세며 밤새 웃었습니다.
가을, 단풍 구경을 간 설악산. 내내 당당한 척하다가 절벽 가까이 가니 다리가 후들거려 창피했던 기억. 제 손을 꼭 잡아주며 '겁쟁이'라고 놀리던 그녀. 절 이끌어주며 자신은 전혀 무섭지 않다던 그 말이 거짓임은 나중에야 알았고, 제겐 가장 소중한 거짓말로 남았습니다.
겨울, 하얀 눈이 쌓여 교통이 마비된 성탄 전야의 서울. 두 손 꼭 잡고 걷던 밤거리. 그녀의 볼은 추위에 빨갛게 물들었고,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서로 섞였습니다. 발자국을 나란히 남기며 걸었던 그 거리.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다 다투고 또 미안하다며 행여나 누가 볼까 수줍게 입 맞추던 순간순간들. 그땐 그 순간들이 영원히 녹지 않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계절을 돌아 찾아온 새로운 봄은 내겐 너무 잔인했습니다.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전 연인이 휴가를 나왔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몇 번인가 스쳐 들은 그 사람에 대해, 저도 모르게 쌓여있던 열등감이 한꺼번에 폭발했던 것 같습니다. 며칠간 연락이 되지 않던 그녀.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 전화기만 바라보며 가슴 졸이던 순간들. 자존심과 미안함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날들.
며칠 만에 만난 그녀를 차에 태운 날. 저도 모르게 크게 질책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요. 아마도 사랑의 방법이 너무 미숙해서? 아니면 나도 모르게 커져버린 소유욕으로 인해서? 확실한 건 제가 많이 부족했다는 거겠죠. 그녀는 창밖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채 녹지 않은 눈 때문이었을까요, 도로에 깔린 얼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화에 못 이겨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제 자신 때문이었을까요.
커브를 돌던 순간, 미끄러지기 시작한 차량.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충돌을 피하려 핸들을 틀어도 차는 제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끔찍하게 길었던 찰나의 순간. 그녀의 비명소리. 순식간에 다가오는 중앙분리대. 유리 깨지는 소리, 펑하고 터지던 에어백. 돌리지 못한 고개.
비록 저는 늦은 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그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는 말이죠. 아니, 사실 저는 세상 그 무엇도 볼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말입니다.
그 후로 몇 해가 지났는지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매화의 향으로 봄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이 얼어붙는 냄새도 알게 되었습니다. 볼 순 없지만 계절은 항상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제 인생이 지금 어느 계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넌 아직 젊어. 봄날은 한참 남았으니 힘내라."
같은 위로는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인생을 왜 허비하냐. 이렇게 봄날을 보낼 거야?"
같은 질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제게 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봄은 짧아서 아름다운 걸까요, 아름답기 때문에 짧은 걸까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순간이 그립습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녀와 겪은 그 봄이. 그녀와 함께한 제 인생의 봄날이. 그녀와 함께 미래를 그려본 그날들이.
매화향이 날 때마다, 프리지아 향이 바람에 실려올 때마다, 저는 눈을 감습니다. 사실 감을 필요도 없지만요. 그저 그 향기 속에서 기억을 더듬습니다. 꽃잎이 흩날리던 교정을, 그녀의 웃음소리를, 함께 걸었던 눈 쌓인 거리를.
볼 수 없지만, 아니 볼 수 없기에 더욱 선명한 기억들. 향기가 불러일으키는 그 기억들이 이제 제게 유일한 봄입니다.
이렇게 전 오늘도 짧은 봄날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저 견딥니다. 매화향이 시작을 알리고 프리지아향이 끝을 알리는 이 계절을, 그녀와의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 계절을.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입니다.
'그저 널 추억해 봄.'
이것이 제 유일한 봄입니다.
당신의 봄은 언제 피어나는지요?
제 봄은 이미 피었고, 졌고, 그리고 영원히 제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