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 I'M HERO 더 스타디움‘ 관람 후기
임영웅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그가 ‘미스터 트롯’에서 우승했다는 걸 알고, 어머님들에게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임영웅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노래 중 내가 알고 있는 건, ‘사랑은 늘 도망가’ 뿐이다. 원래 곡의 주인인 이문세의 노래로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아는 것이다. 그 외에 그가 엄청난 축구 애호가라는 것, FC서울 경기에서 시축을 했었다는 것, 그의 공연에서는 어르신 관객을 위한 배려가 매우 섬세하다는 것, 그런 배려가 또 미담이 되었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다. 연예인 임영웅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들은 것들이 있지만, 가수 임영웅에 대해서 아는 건 전무한 셈이다. 더 많이 알 수 있는 계기도 없었다. 나는 ‘미스터 트롯’을 보지 않았다. 그 프로그램을 어머니는 보셨는데, 어머니의 ‘최애’는 이찬원이다. 이찬원은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 캐스터를 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야구 중계에 초대된 적도 있다. 사실 내가 이걸 알고 있는 이유도 그가 어머니의 최애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야구를 좋아해서다. 임영웅이 축구가 아니라 야구를 좋아했다면, 분명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음악까지 들었을까? 글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찬원의 노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 걸 보면 말이다.
거의 아는 게 없어서 궁금했다고 할까. ‘임영웅 I'M HERO 더 스타디움‘의 언론시사회 공지 메일을 보았을 때, 괜한 객기를 부려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나 혼자 시도하는 소셜 실험. ’임영웅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40대 중년 남자가 임영웅의 공연 실황을 본다면?‘ 시사회는 8월 22일 오후 4시 30분에 열렸다. 30분 일찍 현장에 도착한 나는 이미 극장 로비를 점령한 ’영웅시대‘의 위용에 압도됐다. 어머님들이 용산 CGV의 계단 로비와 바닥에 정렬해 앉아 있었다. 한쪽에는 CGV가 마련한 지원부스도 차려졌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 CGV 명찰을 패용한 직원도 여럿 나와 있었다. 임영웅은 이날 시사회가 끝난 후 기자간담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영웅시대는 극장에 잠시 등장할 임영웅과 눈이라도 맞춰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마케팅 담당자가 말했다. “아침부터 이미 많은 분이 오셨어요.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오셨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임영웅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임영웅이구나!
영화가 시작됐다. 임영웅이 말했다. “저는 영웅시대가 만들어 준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 무대에 등장한 임영웅은 황제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소리 질러~!” 그리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우리 함께 가요. 뚜뚜루뚜뚜. 행복 가득 담은 배낭 하나 메고서” (‘무지개’) 당연히 나는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노래는 듣기 편했고, 가사의 내용은 밝았다. 바로 이어진 곡에서 임영웅은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네리, 해리포터, 데이비드 베컴“(‘런던 보이’)을 노래했다. 2곡의 오프닝 공연 후에는 무대 전체를 돌며 트로트 공연을 선보였다. 축구 애호가 임영웅은 상암월드컵경기장 필드에 관객석을 채우지 않는 조건으로 공연을 기획했다고 한다. 대신 필드 가장자리를 이동하는 형식으로 공연을 준비했을 것이다. “아 사랑아 내 사랑 눈물없는 내 사랑 ~ 소나기만 뿌려주고 가네요~ ”(소나기), “따라따라 따라따라~ 꽉 채워서 한잔 따라~ 세상살이 다 그런 거지 뭐~”(따라따라) 임영웅의 목소리와 잔망스러운 춤과 무대매너에 관객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환호했다. 그제서야 영화 안과 밖의 온도차가 느껴졌다. 나는 기자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발을 까딱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포함해 기자들 중 누구도 영화 안의 임영웅에게 화답하지 못했다. 이게 실제 관객들이 있는 곳에서는 거의 ‘싱얼롱 영화’일텐데... 개봉 전에 이미 약 10만명의 예매량을 기록했다는 뉴스가 기억났다. 이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은 극장에서 함께 노래부르고 박수치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기대할 것이다.
극장을 나와 검색해 보니 실제 공연에서 임영웅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다양한 트로트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영화는 트로트에 국한되지 않은 임영웅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기 위해 공을 들인 듯 보였다. ‘모래알갱이’, ‘우리들의 블루스’, ‘온기’, ‘연애편지’ 등의 발라드곡뿐만 아니라 ‘Do or Die’ 같은 EDM 스타일의 노래와 힙합 장르의 ‘아비앙또’까지. 개인적으로는 ‘아비앙또’를 들으면서 임영웅의 가창력을 실감했다. 나는 임영웅의 음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음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임영웅은 편한 얼굴로, 이보다 더 여유로울 수 없을 것 같은 몸짓으로 매우 정확하게 가사와 멜로디를 전달했다. 다만, 나한테까지 임영웅의 개성이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정말 잘한다는 정도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고작 생각할 수 있는 건, 그처럼 경계를 세우지 않는 목소리와 창법이 임영웅의 힘이지 않을까란 정도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들리는 가사들을 기록한 후, 검색을 통해 제목을 찾았다. 이 글에 적힌 임영웅의 노래 제목들은 그렇게 알게 된 것이다.)
임영웅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40대 중년 남자가 임영웅의 공연 실황을 관람한 후 느낀 건, ‘자신감’이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필드를 비울 수 있는 뮤지션은 얼마나 될까. 축구를 향한 사랑이 크다고 해도 가능한 결정일까. 트로트로 사랑받은 가수가 장르를 확장한 것 또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다. 공연에서 임영웅은 코어 팬들이 가장 즐거울 수 있는 순간을 빼곡히 채우면서도 뮤지션으로서의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자신감은 분명 자신이 받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임영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트로트 가수 임영웅만을 사랑하는 게 아닌 듯 보인다. 최고의 스타로 성장한 한 인간의 서사, 그가 팬들에게 보여준 교감의 품격, 그렇게 다시 폭발하는 사랑. 팬들은 임영웅이 트로트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배신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스타가 오랫동안 꿈꾸었던 것들을 이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경험한 건, 그러한 ‘관계성’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 또한 뉴진스가 어느 날 트로트 곡을 발표한다고 해도 뉴진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