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두, 오늘 버립니다.
제주도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충동 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긴 위한 셀프 선물 반이었다. 11월의 제주도가 의외로 날씨가 꽤 괜찮다. 지구 온난화 때문만이 아니라 11월 육지에 찬바람이 불 때 제주도는 아직 따뜻한 가을 햇빛이 쏟아지고 오름을 따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찐 가을이다.
여행 오래 다녀올 기력도 없고, 휴가도 없어서 그냥 바람이나 쐰다 생각하고 금요일에 반차 내고 내려갔다가 토요일 점심 먹고 올라오는 코스로 정했다.
이번에는 나도 공항패션이라는 걸 한번 해보고 싶었다. 맨날 추리닝에 후드티, 추리닝스커트에 맨투맨만 입을 게 아니라 나도 뭔가 꾸안꾸 여행패션 한번 해보고 싶었다. 컨셉으로는 왠지 락 스피릿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선택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번에 동네 옷가게에서 산 후드티(만화 캐릭터 소녀가 흑백으로 그려져 있음)와 인조가죽 롱스커트 그리고 통굽 에나멜 구두(7cm, 앞굽도 있음)를 준비했다. 오래 걷기는 힘든 신발이지만 어차피 공항에서만 좀 왔다 갔다 하면 되니까 나의 가죽 스커트와 잘 어울릴 것이다.
여행 당일 아침. 렌터카 예약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제주도 렌터카 정도는 가서 해도 되니까 상관없지만, 그래도 원하는 차종이 있으니까 좀 미리미리(*이미 여행 당일이다) 해볼까? 하고 앱을 켰다. 동행자(친구)가 바빠서 내가 예약하고 운전자 추가 링크를 넘겼더니 조금 후에 카톡이 왔다.
'나 면허증 안 가져왔어. 미안한데 이번만 니가 해라.'
뭐시라? 시바알? 이번에는 나 운전 안하기로 했었는데? 친구 취향 따라 큰 차로 예약한 거 당장 취소하고 소심한 렌터카 운전자를 대표하는 차량인 아반*로 바꿨다. 앞굽까지 있는 신발이라 바닥이 유연하지 않다는 게 좀 문제지만 어차피 제주공항에서 서귀포 가는 거리나 회사에서 우리 집 가는 거리나.
렌터카 예약을 전날에만 했었어도 이런 사태는 없었을 텐데, 게으른 자들이 여행하면 꼭 이런 돌발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둘 중 한 명이라도 면허증을 갖고 왔다는 것.
두 번째 실수는 전생에 보부상이었던 내가 잠시 나의 본분을 잊고 바퀴 달린 캐리어 대신 헬스장에나 들고 다니는 보스턴백을 가지고 왔다는 점이었다. 1박 2일에 제주도 총 체류 시간은 24시간 좀 넘는 정도니까 갈아입을 옷이랑 세면도구, 충전기만 있으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짐을 쌌는데, 보스턴백은 싸면 쌀수록 지나치게 빵빵해지는 것 같고, 노트북(전산 하는 직원들은 노트북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엄근진!)) 가방까지 들었더니 손에 든 게 좀 많아 보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출근했다.
국내선 청사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1. 이 구두 생각보다 디게 불편하다.
2. 나 생각보다 짐 디게 많고 이 가방도 ㅈㄴ 무겁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모든 인생의 진리는 이렇게 한 발 늦게 깨닫는 법이다. 그리고 깨달았을 때쯤에는 상황이 대충 ㅈ되기 시작한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내 공항패션을 보더니 친구가 한마디 했다.
"정육점에서 입는 비닐 앞치마 같다."
사람은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고 하나 보다.
작정하고 차려입은 내 공항 패션은 폭망이었다. 구두는 불편하고, 치마는 정육점 앞치마,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후드티는 기모 후드티라 따뜻한 제주 날씨에 땀이 뻘뻘 흘렀다. 11월 말에 차에서 에어컨을 틀어야만 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 때문인가 아니면 내 바보짓 때문인가? 옷은 싸갖고 온 옷이 있으니까 갈아입으면 되는데 신발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원래 편한 슬립온 정도는 한 켤레 더 갖고 다니는 준비성이 철저한 내가 이번만큼은 짐을 줄여 보겠다고 안 싸갖고 왔는데 그게 이번에 크리티컬한 실수였다. 보부상인 내가 1박 2일이나 여행하면서 여분의 신발도 없이 여행하다니 수치스럽다. 다음부터는 여분의 신발 없이는 절대 그 어디에도 가지 않으리라.
저녁을 먹고 물하고 맥주 몇 캔이라도 사러 가려고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분명히 예전에 이 길 따라 내려가면 바로 나왔었는데... 이상하다... 하면서 귤밭 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술기운도 좀 올랐겠다 기분 좋~게 우헬헬헬~ 하면서 걸어가니 동네 개들이 죄다 짖는다. 니들도 한잔 해봐라 이거뜨라! 하며 걸어가던 중, 이상하게 편의점이 너무 안 나온다 싶어서 그제서야 지도 앱을 켰다.
아...
차로는 금방이었는데.
사람한테는 금방이 아니었다.
저녁 먹은 식당에서 편의점까지는 700m.
아직도 200m가 남아 있었다.
이놈의 구두. 집에 돌아가면 당장 내다 버릴 테다. 꼭 무조건 반드시 절대로. 락 스피릿이고 나발이고 반드시 버리겠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지금 버리고 싶은데 맨발로 다닐 수는 없으니 혹시 편의점에 신발 파나? 숙소 욕실에 쓰레빠 있던데 그거라도 신고 나올걸. 그랬다면 걷는 건 느렸어도 발은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편의점에서 식당을 거쳐 숙소까지는 1.1km. 심지어 이쪽 방향은 오르막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실 때의 고난을 생각하며 맥주와 물과 기타 등등이 든 비닐봉투가 손가락을 파고드는 아픔을 견디면서 또다시 나를 보고 짖는 개들에게 사랑과 존중이 가득한 외침을 몇 마디 들려주며 숙소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고생해서 들고 온 맥주 따보지도 못하고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날 밤.
아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젠장 그냥 모르고 잤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서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켜본 것이 화근이었다.
'샤샥'
바닥에 뭔가가,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