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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드로 가는 마지막 기차

정신은 놓았고 기차는 떠났고 친구는 얼어있었다

by 마봉 드 포레

다시 떠돌기 시작하다 - 이번에는 스웨덴

바바리맨이 암약 중인 피렌체를 떠나 다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동안 스웨덴에서 먹여주고 재워줄 친구네 집으로 가야 했다.


문제는 내가 너무 급하게 일정을 잡는 바람에, 친구한테 0월 0일에 너네 집에 가겠다고 얘기해 놓고는 그 집 주소랑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그 집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조차도 모른 채로 무작정 갔다는 점이다.


요새는 그런 인간을 가리켜 P라고 하는데,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으니 비행기 타러 가면서도 숙소 예약도 하고, 친구네 집 주소 몰라도 문자메시지나 카톡 위챗 왓츠앱 같은 걸로 다 실시간 연락이 가능하니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건만, 당시는 2000년 12월이었다. 폴더폰은 한국에 두고 왔고, 인터넷은 인터넷 카페에 가야만 쓸 수 있었고, 아직도 친구랑 연락할 때도 편지와 이메일 반반 섞어 쓰던 그런 시절이었다. 노트북? 그런 소수의 특권층만 갖는 물건을 내가 무슨 수로 가져.


그러니 저렇게 무작정 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P라고 한다면 나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P의 대왕이고 황제이고 대마왕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친구가 어디 사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친구는 스웨덴의 룬드(Lund)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룬드 대학이 있는, 스웨덴에서 대학 도시로 유명한 작은 동네다. 나는 얘네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코펜하겐으로 해서 가기로 결심했다. 왜냐면 룬드는 스웨덴의 남쪽에 있었고 스톡홀름에서 가는 것보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게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식이었는가 하면:

1. 지도책을 펼친다.

2. 친구가 사는 도시를 찾는다.

3. 가까운 공항을 찾는다.

4. 간다.


요새는 구글맵이 있으니 그걸로 보면 되지만 라떼는 말이야 지도책이라는 게 있었다. 일명 월드 아틀라스라고. 그래서 거기서 룬드 찾아서 자를 대고 스톡홀름이랑 코펜하겐에서의 거리를 보면... 아니 자로 재 볼 것도 없이 그냥 눈으로 봐도 가깝다.


그래서 나는 지금으로서는 정말 민폐이긴 한데, 피렌체를 떠날 때 친구한테 이메일로 '0월 0일에 코펜하겐으로 간다. 00시에 내린다. 편명은 BA000.'라는 말만 남기고 잠적했다.


잠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인터넷을 쓸 데가 없었다. 나는 피렌체를 떠나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서 1박을 한 다음(여기서도 누군가의 집에 신세를 졌다. 글로벌 민폐족이었다) 다시 히드로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말뫼 수드, 말뫼 센트럴 - 북국의 기차역

코펜하겐 공항에 내려서 나는 생각했다.


'아, 근데 얘네 집 어떻게 가는 거지?'


왜 그 생각을 도착해서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코펜하겐에 내려서 룬드 가는 것만 생각했지 룬드가 다 걔네 집이 아닌 이상 어떻게 가야 할지도 미리 생각을 했었었었어야 했다. 근데 내가 또 누구냐, 메일 확인을 안 했다. 그냥 일단 룬드로 간 다음에 인터넷 카페를 찾아서 거기서 메일을 보내 나 지금 여기 룬드니까 나 좀 델러오라고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일단 ㄱㄱ! 갔다.


기차표를 사러 갔더니 줄이 길었다. 룬드 간다고 하니까 말뫼(Malmö)에서 갈아타세요~ 하고 표를 주었다.


ㅇㅋㅇㅋ 말뫼 카피 알았다. 기차를 탔다. 기차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해협 해저에 난 터널을 타고 가는데, 터널 길이로만 보면 유로스타보다는 짧았지만 밖에도 볼 게 하나도 없어서 더 지루했다. 하긴 뭐 런던 워털루-파리 노르드역 가는 유로스타 탔을 때도 뭔 놈의 나라가 이렇게 바깥풍경이 지루하냐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그냥 깨끗하고 정갈하고 지루했다. 차츰 국제 미아가 될까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말뫼(라고 생각한 곳)에 내렸다. 내려서 사람들이 막 움직이는 곳을 따라 가는데 어떤 남자가 내 등을 두드렸다. 나의 미모에 누가 또 반한 것인가? 하고 돌아보니 웬 젊은 총각이 나에게 말했다.


"야, 너 룬드 간다며? 여기 말뫼 수드(Malmö Syd(south))야. 너 한 정거장 더 가야 돼."


"오매! 내가 룬드 가는 걸 네가 우찌 아니?"


"아까 너 공항에서 기차표 살 때 내가 너 뒤에 있었어."


"세상에, 나 그럼 우짜냐?"


"여기 그냥 있다가 다음 열차 오면 그거 타면 돼. 근데 한 시간 후에 온다?"


"오오 고마워! 복 받아라!"(복 받아라 라는 말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착각하고 말뫼 수드에 내리는 사람이 많았는지 아니면 그냥 다른 이유인지 지금은 역 이름 자체가 스보예르토르프(Svågertorp)로 바뀌었지만, 이런 연유로 해서 나는 스웨덴 땅을 이 말뫼 수드 역에서 처음으로 밟아 보았다.


역은 옥외 플랫폼이었다. 새삼 12월의 스웨덴이 얼마나 추운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전날까지 피렌체에 있었던지라 거기도 나름 춥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북쪽이라 해도 짧고(이미 밤이다) 바람은 매서웠으며 눈이 쌓인 허허벌판에 역 하나 달랑 있어서 어디 숨을 데도 없었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역은 지선 연결이 없고 오로지 코펜하겐에서 말뫼 가는 기차가 중간에 서는 역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말 그대로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떠나 왔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이런 병신 같은 인간이 두 명은 없기를 바라며 북국의 바람이 부는 말뫼 수드 역에서, 꽁꽁 얼어붙은 주제에 의연한 척하고 서서 한 시간 동안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룬드 도착: 친구야 미안해... 지금도 미안해...

드디어 기차가 왔다. 내리는 사람은 있어도 타는 사람은 없는 이 역에서 드디어 타는 사람이 생겼다. 문제는 그게 바로 나였다. 말뫼 센트럴에 내려서 룬드 가는 기차... 아니 전철…를 탔다. 내가 탄 게 룬드 방향으로 가는 그날의 마지막 열차였다.


룬드 가는 소박한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오늘 친구 집에 못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하는 인터넷 카페도 있는 런던이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인간들이 수도 없이 많은 피렌체와는 달리, 룬드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보는 마을들은... 너무나 시골이어서 역 주변에는 불 켜진 건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여기는 다 일찍 문을 닫는다. 게다가 룬드 규모를 대략 상상해 볼 적에, 역 앞에 인터넷 카페가 없을 수도 있었다. 대학 도시니까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 내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열려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룬드까지 가는 것만 생각했지, 내린 다음에 친구 집엔 어떻게 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어제 런던에서 1박 할 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메일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집 전화번호랑 주소를 적어놨어야 했다. 근데 이게 뭐냐고. 무슨 룬드 내려서 친구 이름 부르면 친구가 뛰어나올 것처럼 생각하고 온 거 아니냐고. 이런 정신 나간 친구를 둔 걔도 진짜 불쌍하다.


적어도 룬드에 호텔은 있겠지. 그럼 비싸겠지만... 일박은 여기서 해야겠다,라고 나는 거지인 주제에 스웨덴에서 호텔에 갈 결심까지 하고 룬드 역에 내렸다.


룬드 역에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더럽게 차가운 밤공기에 굵은 눈송이가 펄펄 휘날리는 그 룬드 역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ㅅㅂ... 동네 진짜 쪼그맣네 하고 생각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왔다. 세상에!!! 내 친구가 나 언제 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친구와 나는 룬드역 플랫폼에서 얼싸안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애가 그냥 꽁꽁 얼어 있었다.


"나 지금 올 거 어떻게 알고 기다렸어?"


"네가 메일확인을 안 하길래 코펜하겐 내려서 여기 도착할 수 있는 기차가 세 대라, 셋 중 하나는 타고 오겠지 싶어서 기다렸어!"


그리고... 내가 타고 온 게 그중 마지막 열차였다...(미안하고 민망해서 땅으로 꺼져드는 중)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친구한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애를,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기차 세 대를 다 기다려 가면서 어떻게 기다렸을까? 나 같으면 얼어죽든 말든 냅뒀으련만, 천사 같은 친구다 정말.


인터내셔널 민폐족 코리안은 이렇게 해서 룬드에 무사히 도착하여, 거기서 일주일을 묵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민폐를 아주 골고루 끼친 다음 런던으로 돌아갔다.


친구야, 네가 한국어로 글 올라오는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볼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기적이 생겨 번역이라도 해서 보게 된다면 내가 니 이메일 주소를 날려버려서 그러는데 연락 좀 주라. 나 진짜 너한테 신세 좀 갚고 싶다.

제 친구 당시 인상착의를 알려주고 챗순이 보고 그리라고 했는데 실은 친구가 더 예쁩니다. 보고 싶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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