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원하는 것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레이는 침통한 마음으로 자기 침실로 들어가 버리는 플로르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잘 파악하고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자부했던 레이는 이번에는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무슨 권리로 플로르 왕자의 감정을 진심인지 아닌지, 한때의 치기인지 인생을 건 결심인지 판단한단 말인가? 자신이 뭐라고 세라비를 이 나라 왕비로 만들겠다고 게로스의 감정과 세라비의 감정을 조종하려고 든단 말인가?
플로르의 침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플로르가 진심으로 레이를 대했으니 레이도 이제 진심으로 플로르에게 맞서야 했다. 레이는 플로르의 침실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문 틈에 대고 말했다.
“왕자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다 알고 있을 것 같겠지만… 저도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요. 다 아는 척하는 것뿐이에요…”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레이는 플로르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왕자님의 게로스 폐하에 대한 마음을 가볍게 생각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같이 브뤼메 산맥을 넘어오면서 왕자님을 걱정하고 보호하려고 했던 건 진심이에요.”
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잘못한 걸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마음 풀리시면 다시 말 걸어 주세요.”
레이는 말을 마치고 플로르의 방을 떠났다.
그날 저녁에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플로르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레이는 플로르가 유일하게 말 섞는 상대인 레이첵을 시켜 먹을 것을 플로르의 방에 갖다 주도록 했다. 조엘린 부인에게는 왕자님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하루 종일 기도하시는 날이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조엘린 부인은 왕자의 신앙심에 깊이 감동하며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 레이는 왜인지 일찍 잠이 깨서 정원으로 나갔다.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부는 이른 가을 아침이었다. 해가 곧 뜨려는지 동쪽 하늘이 짙은 파란색에서 점차 연한 파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레이는 차갑고 습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공기에서는 정원의 나무와 풀 냄새가 났다. 레이는 그랑쿠르의 언덕에 있는 집에서 저 멀리 에르피냥의 바다를 바라보던 아침들을 떠올렸다. 에르피냥의 바다는 아침에는 푸른 띠처럼 보였고 밤에는 카마와 로나의 빛을 반사해서 수평선까지 금빛으로 반짝이는 길을 만들었다. 레이가 어릴 때 자다가 나쁜 꿈을 꾸거나 하면 라마야나는 레이를 업고 뜰 앞에 나가서 밤바다에 비친 달빛을 보여주며 고대의 마법사들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레이는 이어서 템푸스 아르카의 라마야나의 집 앞뜰에서 바라보던,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결치던 구름의 바다를 생각했다. 그 집들은 둘 다 라마야나가 남겨 준 레이의 집이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 플로르가 와 있었다. 오늘은 얼굴도 부어 있지 않았고 침착해 보였다. 플로르는 레이의 옆에 말없이 서서 정원의 나무들과 새벽하늘 그리고 담 너머 왕궁 중정에 옅게 끼어 있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레이가 플로르의 침실 문 밖에서 용서를 빌 때 플로르는 방문 바로 뒤에서 레이의 말을 듣고 있었다. 플로르도 브뤼메를 넘을 때, 그리고 이제까지 여행하던 모든 날들에 레이가 자신을 진심으로 보호해 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걷지 못하고 주저앉은 자신을 업은 채 혼자서도 오르기 힘든 산을 군소리 않고 오르던 레이의 등을 플로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발이 아파도 말도 못 하고 참고 있을 때 레이가 와서 말없이 약을 발라주고 내일은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 주던 그 모든 모습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레이를 용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이는 이제 그에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일시적으로 화가 나고 배신감에 몸서리치더라도 결국은 다시 받아들이게 될 가족이었다. 그러나 진짜 혈연이 아닌 이상 레이는 언젠가 떠날 수도 있었다. 플로르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레이는 플로르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플로르도 레이를 바라보았다.
“진짜로 뭐든지 다 하실 거예요?”
레이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깐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플로르는 게로스를 여전히 사랑했다. 일생 동안 그 누구도 게로스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게로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이카리아의 왕이 되어야 했고 그때는 반드시 게로스 같은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약함 또한 알고 있었다. 게로스처럼 되려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에게는 레이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날카롭게 읽고 모두를 설득할 수 있는,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고 곁에 있어 줄 조언자가 있어야만 했다. 플로르는 이제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저는 이카리아의 왕이 될 거예요. 전 제 사람이 필요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편이 되어 주세요.”
이 예상치 못한 요구에 레이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이 요구가 무슨 의미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기 위해 중정 너머의 안개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레이는 마치 발이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눈앞에는 슐로스 루와얄이 아니라 처음 보는 크고 화려한 방이 펼쳐져 있었다. 레이는 벽과 기둥에 장식된 세 수호신의 문양과 클레르몽 왕가의 문장으로 그곳이 팔레 에클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은 팔레 에클라 안의 의정실이 틀림없었다. 신하들로 보이는 많은 엄숙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옆에 앉은 사람이 플로르 왕자, 아니 플로르 왕임을 알아보았다. 맑고 투명한 소년이었던 플로르가 성인이 되어 위엄 있는 왕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플로르 왕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레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스승 라마야나처럼 그도 이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자신도 미래를 보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이는 알 수 있었다. 라마야나도 바로 이곳 슐로스 루와얄의 어딘가에서 이렇게 미래를 본 것이었다. 그는 다섯 살의 어린 레이를 만나 그를 키우고 가르쳐서 모든 것을 물려주는 미래를 보고, 그 미래 하나를 위해 칼베르에서 쌓은 모든 지위와 명성을 버리고 이카리아로 왔던 것이다.
그는 라마야나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아들이었지만, 스승의 죽음 이후 더 이상 그를 어딘가에 묶어두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열다섯 살의 소년 왕자가 무조건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요구할 때까지는.
레이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곁에선 플로르 왕자가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는 그날, 플로르 왕자에게 무릎을 꿇고 조건 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