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레이의 폭로

세라비와 레이, 레이와 플로르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한편, 뤼미에르관에서는 레이첵만 빼고 모두 우울하거나 혼란스럽거나 당황스러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레이첵은 생각했다. ‘아니, 왜 다들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기분도 다 안 좋아 보이지? 기록할 것도 없고 책도 읽다 지치네. 다들 각자 바쁘게 지내는 모양인데 나도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어!’


그래서 레이첵은 슐로스 루와얄에서 만난 서기관이 가져다준 새로운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플로르 왕자를 데리러 가는 심심했던 마차 여행 중 이것저것 떠올랐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레이는 방 안에서 심란한 기분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물론 만족스럽긴 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플로르 왕자가 자신에게도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게로스와 클로드 에티엔 부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뤼미에르관으로 돌아오던 중, 세라비가 플로르의 냉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레이는 어서 플로르 왕자의 기분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레이는 플로르 왕자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걸어 보았다.


“왕자님,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내일 샤토 데쥬에 갈 때도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네요!”


그날은 조금씩 바람이 차가워지는 맑은 가을 날씨였다. 정원의 잔디는 붉은 단풍잎과 너도밤나무의 황갈색 잎으로 덮이고 코스모스는 꽃잎을 떨어뜨리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플로르는 지금쯤 아직도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고 바닷가 쪽에서 짠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오고 있을 이카레이유를 떠올리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카레이유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비참한 감정이나 느끼게 될 줄 알았더라면. 이카리아에 돌아가는 날까지 아무도 자기에게 말도 걸지 말고 그냥 혼자 두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레이는 플로르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놀라 플로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플로르는 레이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는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세라비와 레이첵은 플로르보다 먼저 올라가고 없었기 때문에, 정원 안에는 레이 혼자만 남았다. 레이는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플로르 왕자가 저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플로르 왕자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레이는 그런 반응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레이는 살면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미움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가벼운 질시 정도는 받아 봤지만, 그 사람들조차도 레이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설령 레이를 안 좋게 봤던 사람일지라도, 레이가 맘먹고 대하면 다들 레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남녀노소 안 가리고 심지어 동물조차도.


레이는 사람 다루는 데는 자신 있었기 때문에 플로르 왕자도 금방 풀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라비에게 화가 난 거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니까 잘 달래 주고 지금 세라비 님이 게로스 폐하와 친해지는 게 얼마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얘기해 주면 당연히 풀리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레이가 자기 방에 앉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레이의 방 문을 두드렸다. 얼굴에 나 어떡해 라고 쓰여있는 세라비였다.


“레이,” 세라비가 불안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면 좋지? 혹시 내가 왕자님한테 뭐 잘못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레이는 한숨을 길게 쉬며 생각했다. ‘둔한 인간들은 너무 둔해서 문제고 예민한 사람은 너무 예민해서 문제고. 이쪽도 저쪽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네. 일단 세라비 님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오늘 충격받아 잠도 못 자겠지만 알려는 줘야겠다.’


“레이, 너도 봤지? 왕자님이 나한테 요 며칠 계속 쌀쌀하게 대하시는데 뭐 때문에 화나신 건지 말도 안 해주셔. 넌 알 거 아냐. 얘기 좀 해줘. 나 뭐 잘못했어?”


레이는 진심으로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플로르 왕자를 이카레이유에서 처음 알현할 때에도 혼자 못 알아듣고 있더니(하지만 옆에 있던 레이첵도 못 알아듣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이놈의 둔탱이 세르비카들…!) 이번에도 전혀 눈치를 못 챘단 말인가?


“세라비 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눈치가 없으시네요. 게로스 폐하가 세라비 님한테 관심을 가지니까 왕자님이 질투하시는 거잖아요!”


세라비는 가슴에 뭔가가 쿵 하고 박히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레이는 답답해서 날뛰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확고한 어조로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게로스 폐하가 세라비 님한테 관심 있으시다고요!”


세라비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그건… 나를 첩자라고 의심해서…” 세라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레이는 세라비를 방 안에 남겨놓고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왕자님한테 그만 사과하세요. 기분만 더 나빠지실 거니까요.”


“레이!” 세라비가 황급히 레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럼 나 어떻게 해야 돼?”


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누군가 물어보는데 아무런 답도 해주지 못하다니, 레이의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레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충격으로 저 세상으로 날아가버리기 직전인 세라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방에 가서 기다리세요.”


세라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이는 세라비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플로르의 방으로 건너갔다.


레이는 복도를 지나 플로르의 방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도 없고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레이는 재차 문을 두드렸다. 세 번째 두드려도 답이 없자 레이는 오늘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때 문이 열리며 문 틈으로 플로르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인데요?” 플로르가 문 틈으로 물었다.


“왕자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싫어요. 돌아가세요.”


플로르는 문을 닫았다. 레이는 기운이 빠져서 플로르 방 문 앞에 아까 세라비처럼 주저앉을 뻔했다.


레이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니 세라비는 아직도 레이의 응접실에 주저앉아 있었다. 레이는 세라비를 일으켜 세워서 어깨와 등을 두들겨서 편 다음 방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하녀를 불러서 세라비에게 차를 좀 끓여주고 뭐든지 단 것 좀 먹이라고 당부했다.


레이는 위층으로 올라와 다시 플로르의 방 문 앞에 섰다. 문 너머는 여전히 조용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레이는 다시 가만가만 문을 두드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문이 빼꼼 열렸다.


“왜 자꾸 오세요?”


“왕자님, 평생 저랑 말 안 하실 생각이세요? 적어도 이카리아로 돌아갈 때까지는 저하고 말은 하셔야죠. 잠깐만 얘기해요.”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이렇게 강경하게 밀어붙여도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카리아에 돌아가서 감옥에 갇힌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렇게 해야만 했다. 플로르가 문을 열어주었다.


플로르는 여전히 레이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앉으라고 손짓했다. 레이는 소파에 앉았다.


“하실 얘기가 뭔가요?”


“전하,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얘기를 안 해주시면 알 수가 없잖아요?”


“얘기를 해야만 아신다면 그것부터가 잘못인 것 같은데요.” 플로르는 차갑게 말했다.


레이는 말문이 막혔다. 플로르의 증오와 울분이 말투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가 왜 따라왔는지 레이 님만은 알아주실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도 못 하고 안다 해도 가볍게 여겼을 테지만… 레이 님만은 처음부터 제 마음을 꿰뚫어 보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레이 님만은 제 마음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속으로 비웃었죠?”


레이는 이카레이유에서 플로르 왕자가 눈물이 글썽한 채 게로스 님에게 가고 싶다고 토로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플로르가 진심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과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플로르의 고백도 그저 고생 따위 안 해본 지위 높은 어린애의 철없는 사랑타령이라고 여겼다. 죽을 수도 있는 길을 가는 사신들을 불러놓고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가고 싶으니 데려가 달라는 게 솔직히 곱게 보이진 않았다. 높은 자들은 항상 그렇게 아랫것들의 일을 쉽게 생각했다. 레이의 눈에는 플로르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플로르가 게로스를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세라비를 들이민 것은 실수였다. 그러나 레이가 알면서도 그렇게 한 것은 진짜로 플로르의 감정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애들이 한때 멋진 형님 좀 좋아할 수도 있지, 하고.


플로르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커다란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울먹이느라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플로르는 말했다. “이럴 거면 왜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어요? 오는 길에 제가 짐만 되었을 텐데요. 하긴 승낙은 레이 님이 아니라 세르비카 양이 하셨죠.”


레이는 이렇게 날것으로 들이미는 감정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플로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제 레이 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나가 주세요. 이카리아로 돌아갈 때까지 말 안 해도, 레이 님은 어차피 상관없으실 테니까요.”

레이 플로르 문 사이.png 카펫 깔린 별관 복도에서 레이가 문고리를 잡고 서 있고, 플로르는 방 안에서 문틈 사이로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한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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