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코린의 폭로

차라리 절 때려 주세요

by 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레이가 게로스에게 세라비를 그토록 들이미는 꼴만 안 보였어도, 어쩌면 플로르는 레이에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이카레이유에서 사신단을 따라 칼베르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세라비나 옆에 있던 레이첵은 그러시군요 하고 받아들였지만, 레이만은 플로르의 본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렇다. 레이는 플로르가 어떤 마음으로 칼베르에 가는지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플로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플로르가 있는데도 그 앞에서 게로스에게 세라비 칭찬을 하거나 두 사람이 말을 섞도록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을 보니, 레이는 플로르의 진심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안다 해도 그저 철없는 아이의 한때의 치기라고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칼베르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물론 레이첵이 있긴 했지만, 플로르는 여기까지 오면서 세라비와 레이에게 정말 많이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로스는 원망스럽고 세라비는 밉고 레이에게는 배신감을 느낀 이상 이젠 칼베르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카리아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플로르는 이 모든 상황이 악몽 같았다. 그는 방에서 밤새도록 흐느껴 울다가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났다. 세라비가 응접실에 올라와서 같이 아침 먹자고 부르고 있었다. 요새 플로르가 냉랭하게 대했으므로 오히려 더 살뜰하게 챙기고 있었다.


“아니 왕자님, 얼굴이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우셨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스러워하는 세라비의 얼굴을 본 플로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그냥 좀 놔둬 주실래요? 아침도 어련히 알아서 먹으러 가겠죠! 일일이 챙기러 오지 마세요!”


세라비는 이카레이유를 떠나온 후 처음으로 왕자가 자신에게 화를 내자 너무 놀라서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서있다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내려갔다. 왕자의 방 맞은편이 레이의 방이었기 때문에 레이도 이것을 들었다.


‘왕자님이 세라비 님을 질투하는군.’ 레이는 생각했다. ‘저쪽은 거의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이런 복병이 나타났네. 왕자님을 어떻게 풀어주지?’


그러나 왕자는 아침도 먹지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점심때가 되자 조엘린이 다들 안녕하신지 보러 왔다가 플로르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자 아픈 줄 알고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래서 플로르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게로스와 점심을 같이 하기로 되어 있었다. 게로스는 일정이 너무 바빠서 이제야 시간이 생겼다며 모레쯤 약속한 대로 솔렌을 가지러 샤토 데쥬에 가자고 했다.


“가는 건 좋은데, 솔렌이 거기 있으면 다른 분이 갖고 오실 수는 없었던 건가요?” 세라비가 물었다.


“뭔가 장벽 같은 것으로 둘러싸여서 접근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게로스가 대답했다. “그래서 대신전의 사제들과 파렌베르크 마법 회당의 마법사들도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나 보군요.” 레이가 말했다.


“그동안 궁 안에만 계셨으니 오랜만에 야외로 나가시는 것도 기분전환이 되실 겁니다. 샤토 데쥬는 반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니까 많이 힘들지도 않으실 거구요.” 게로스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플로르 왕자가 아무 말도 없이 접시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플로르가 도착한 첫날 네 사람의 상봉 장면을 보았던 게로스는 플로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왕자가 도착한 날, 뤼미에르관에서 플로르를 기다리던 세라비와 레이는 몇 달 만에 만나는 가족처럼 플로르를 반겼던 것이다. 플로르는 왕자이고 두 사람은 그 나라의 외교관인데도 마치 그들은 친 형제나 남매처럼 서로 끌어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아마도 같이 고생하며 여기까지 오느라 각별한 애정이 생겼나 보구나, 라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플로르가 세라비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것을 게로스는 눈치챘다. 세라비가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플로르가 세라비의 눈을 피하고 대답도 잘 하지 않는 것도 눈에 보였다. 플로르 왕자가 세르비카 대사에게 그 며칠 안 되는 기간 동안 뭔가 기분 상할 일이 있었을까? 처음에는 그렇게 반가워하더니?


게로스는 이내 플로르가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음을 알았다. 그전까지는 게로스에게 정중하면서도 수줍은 듯이 대하던 플로르가 저 무렵부터는 자신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피했다. 게로스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부끄러워서 눈을 못 마주치는 사람이야 살면서 삼천 명 정도 보았지만 플로르는 애초에 그러진 않았던 것이다.


게로스는 이 모든 것이 대체 어떤 상황인가 곰곰 생각했다. 플로르 왕자가 세르비카 대사에게 화가 날 일이야 뭐 같이 부대끼며 지내고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자신에게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을까? 도착해서 자기 얼굴만 보고도 환희에 넘치는 표정을 하던 저 애가?


게로스는 다른 사람의 감정 변화를 민감하게 잘 읽는 사람이었다. 그 능력으로 정적으로 가득 찬 회의나 적국과의 외교 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소년의 마음을 읽어야 할 일은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게로스는 주의 깊게 추론해 보았다.


‘플로르 왕자가 세르비카 대사를 갑자기 싫어하게 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이고, 특히 더 기분 나빠 보일 때는 나와 세르비카 대사가 대화할 때인 것으로 보아 플로르 왕자는 내가 세르비카 대사와 얘기하는 것이 싫은 것 같다.’


‘플로르 왕자가 좋아하는 건 나니까, 왕자는 세르비카 대사를 질투하고 있군. 그냥 대화만 하는 건데도 저렇게 질투하다니, 청소년들의 감정은 정말 복잡하군.’


자신도 한때 청소년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감정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고 성인이 되어버린 게로스는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최근 들어 같이 식사한 사람들 중에 여성은 세르비카 대사 말고는 조엘린 부인뿐이었으니 비교 대상이 없군. 내가 특별히 세르비카 대사하고 말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반응하다니 놀랍네.’


게로스는 그러나 혹시라도 자신이 세르비카 대사를 편애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앞으로도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겠다 싶어서 이 부분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남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철저히 관리해 왔으므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확인해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게로스는 마침 집무실에 들어왔던 코린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대부분의 식사 자리에 코린도 같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문제가 될 만한 점이 있다면 코린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코린 경, 혹시 내가 그동안 식사 자리에서 이카리아 대사들에게 좀 소홀하진 않았나? 경이 보기엔 어때?”


코린은 파빌리온에 갔던 날 브리엘 부대사 때문에 혼이 잠깐 나갔었지만, 그 이후로 정신을 차리고 게로스의 태도를 잘 관찰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남들이 볼 때의 자신의 모습을 관리해 왔던 그의 왕은 이제 세르비카 대사에게 확실히 다르게 대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파빌리온에 갔던 하루 만에 발생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브리엘 부대사가 세르비카 대사를 폐하에게 접근시키려고 일부러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코린은 그날의 일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코린의 눈에도 세르비카 대사는 아무 생각도 없는 반면 게로스가 오히려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게로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살면서 이성에게 끌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코린은 게로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에게 여자를 접근시키는 것은 절대 막아야 할 일이지만, 만약 게로스가 의지를 가지고 누군가를 가까이하고자 한다면 코린이 막을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코린은 게로스의 질문을 듣고 게로스가 자신의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남들 감정은 귀신같이 읽어내면서 어떻게 자신의 감정은 저토록 하나도 모를 수가 있을까? 코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로스는 코린이 대답을 하지 않자 왠지 불안해서 다시 물었다. “내가 혹시 결례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겠지?”


코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폐하는 철석같이 예의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으십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당신 지금 큰일 나게 생겼으니 주의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좋을까? 저 남자 스물일곱이나 되어갖고 지금 자기가 여자한테 눈길 주고 있는 것도 몰라서 지금 나한테 이걸 물어보는 건가?


코린은 결심했다. 그가 이걸 말하는 바람에 게로스의 신뢰를 잃는다 할지라도, 게로스에게 알려야 한다. 세르비카 대사랑 잘 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저렇게 대놓고 눈길을 주면, 나중에 혹시라도 오스틴 대사나 스칼하븐 대사, 혹은 궁 안에 침입해 있을지도 모르는 적국에 포섭된 하녀나 하인들이 눈치채고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아는가?


“폐하,” 코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를 나무라셔도 좋고 때리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최근 들어 세르비카 대사님을 좀 많이 쳐다보고 계십니다.”


게로스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코린은 게로스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자, 뭔가 더 지시나 질문이 있을까 싶어 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코린 폭로-final.png 코린과 게로스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있는 장면.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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