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플로르는 그날 저녁 뤼미에르관의 자기 방에서 어쩐 일인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이카레이유를 떠난 이후로 가장 편안한 곳에서 자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게로스는 모두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세르비카 양을 바라볼 때에는 왠지 눈빛이 더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게로스가 세라비에게 말을 걸거나 특별히 더 챙기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플로르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겨우겨우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네 사람이 뤼미에르관에서 아침식사를 거의 다 마쳤을 때 슐로스 루와얄의 시녀장이 찾아왔다. 그녀는 식사를 방해한 것을 사과하며, 오늘부터 내궁을 맡게 되실 조엘린 카를링겐 부인이 잠시 후 방문할 예정임을 알렸다.
“내궁이 뭐죠?” 시녀장이 돌아간 후 세라비가 플로르에게 물었다.
“사교나 접대나 의전 같은 것들을 하는 업무예요. 보통은 그런 일은…” 플로르는 왠지 왕비라는 단어를 말하기가 싫어서 잠시 주저했다. “보통은 왕비의 일이에요. 저희도 어머니께서 하고 계시구요. 여기는 선왕비 전하가 승하하신 뒤로는 아마 게로스 폐하께서 혼자 다 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쩐지 너무 바쁘시더라. 다른 분이 맡아주실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네요.” 세라비가 말했다. “조엘린 카를링겐 부인이라면 친척 되시는 분일까요?”
게로스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지 다 탐구하느라 자기네 왕실 족보는 못 외워도 옆 나라 카를링겐 왕가라면 게로스의 먼 친척들 이름까지 싹 다 외우고 있던 플로르 왕자는 아는 모든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으나 그중에 조엘린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잠시 후 뤼미에르관을 방문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클로드 에티엔과 그의 갓 결혼한 아내 조엘린이 플로르 왕자와 이카리아 대사들을 방문하러 왔던 것이다.
파렌베르크를 여러 번 방문했던 플로르도 클로드 에티엔은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게로스의 육촌 동생이자 어제 같이 식사했던 오귀스트 대공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무국장이기도 해서 세라비가 슐로스 루와얄에 들어와 수정 테라스의 벽을 타고 올라오기 전날 남서부 해안 지역의 병참 후보지들을 점검하러 떠나 며칠간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자마자 이카리아 왕자 및 그 일행을 뵈러 온 것이었다.
세라비는 클로드 에티엔을 보자마자 ‘우리 동네에 한두 명 정도 있을 것 같은 얼굴이네.’라고 생각했다. 게로스처럼 빛나는 금발에 연한 파란 눈을 한 클로드 에티엔은 라를르 마을 같은 농촌에서 소를 몰거나 짚단을 나르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가 세라비를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해 준 ‘원래 칼베르 왕가에서 그런 얼굴이 나올 수가 없는데 아버지가 워낙 인물이 좋았다’라고 한 말이 실감이 났다. 그 증거로 눈앞에 있는 클로드 에티엔뿐만 아니라 어제 같이 식사한 오귀스트 대공도 매우 친근한 외모였다.
클로드 에티엔은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아내인 조엘린은 잘 웃지는 않았지만 단정한 외모에 역시 따뜻한 눈을 하고 있었다. 세라비는 그녀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들 중에 이런 얼굴이 몇 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시기 직전에 제가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이제서야 뵙게 되었습니다.”하고 클로드 에티엔은 말했다. “이렇게 힘든 때에 도와주러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레이는 ‘누가 누굴 도와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는 클로드 에티엔이 역시 마음에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이네. 계산된 표정만 짓고 있는 게로스하고 너무 다르다.’
“오늘부터 제가 내궁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모시도록 할 테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특별한 일 없으면 매일 뵈러 오겠습니다.” 조엘린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따뜻했지만 말의 끝맺음이 확실해서 믿음직하게 들렸다. 플로르는 조엘린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어떤 여자가 ‘카를링겐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지 내심 긴장했었던 것이다.
게로스는 조엘린 덕분에 시간 여유가 좀 생겨서 그런지 그 이후 대체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특별한 일 없으면 클로드 에티엔 부부와 플로르 그리고 대사 일행들과 식사(주로 저녁)를 자주 했다. 조엘린의 등장으로 이제 뤼미에르관에 게로스 대신 조엘린만 찾아오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던 플로르 왕자로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플로르는 게로스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기쁨 대신 당혹스러움과 불쾌함만 늘어났다. 플로르는 첫날 저녁식사 때 게로스가 세라비를 자주 쳐다본다고 느꼈던 것이 착각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확실히 세라비를 남들보다 더 자주 쳐다보고 세라비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들은 눈치 못 챌지 몰라도 항상 게로스를 바라보고 있던 플로르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플로르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오히려 레이였다. 레이는 게로스에게 우리 세르비카 대사님이 일만 하시느라 안 꾸며서 그렇지 이카레이유에서 소문난 미인이라는 둥(레이첵은 들으면서 기가 막혔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온갖 이야기로 세라비를 게로스에게 들이밀고 있었다.
플로르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레이가 먼저 두 사람의 감정 조작을 시작한 것인지 세라비가 유혹한 것인지(이건 가능성이 낮았다) 아니면 게로스가 자연스럽게 끌린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게로스는 세라비에게 확실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플로르는 그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게로스를 단지 보고 싶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그 고생을 하며 파렌베르크에 온 것을 후회했다.
물론 그가 처음 이카레이유를 떠나올 때에는 그저 그분을 보고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카리아의 왕이 될 몸이니 언제까지나 칼베르에 머무르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웃나라들이 게로스를 두고 전쟁을 하는 이상 언젠가 그를 영원히 못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플로르는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그날 - 세라비와 레이가 이카레이유에 아버지를 알현하러 궁에 들어왔던 그날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었다.
플로르는 뤼미에르관의 자기 방에서 중정 너머 멀리 있는 게로스의 방 테라스를 바라보며 흐느꼈다.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하며 왔지만, 사실은 자신도 그런 눈길과 관심을 받고 싶었음을… 그게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도 가슴이 아플 텐데, 그 눈길의 대상은 하필이면 세라비였다.
세라비가 게로스의 관심을 알아채고 있는지는 플로르는 알 수 없었다. 세라비가 속으로 ‘아직도 나를 첩자라고 의심하나?’라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물론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플로르는 세라비가 미웠다. 그러나 세라비와 이제껏 같이 했던 여정을 생각하면 세라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무시무시한 벼락이 치는 산에서 자신에게 담요를 둘러주며 꼭 안아주던 세라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위해 불평 한 마디 없이 잘 곳을 찾아주고 먹을 것을 준비해 주며 데리고 와 준 세라비, 우리 왕자님에게 감자껍질 깎게 했다고 요정에게 화를 내던 세라비, 왕자님이 낫기 전까지는 수도원에 두고 갈 수 없다고 강경히 버티던 세라비. 엄마 같고 누나 같고 형님(?) 같던 세라비를 게로스의 눈길을 받는다는 이유로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플로르는 세라비가 미웠지만 세라비를 미워하는 자신은 더더욱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질투는 강력한 감정이었다. 플로르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세라비에게 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세라비에게 말을 걸지 않음은 물론 세라비를 봐도 눈을 피하고 대답도 잘 하지 않았다. 세라비가 당황하면서 플로르에게 더 다정하게 대하자 그는 세라비에게 짜증을 냈다. 차라리 그냥 놔두었으면 했지만, 세라비는 그럴수록 더 당혹스러워하며 플로르에게 더 잘하려고 했다. 플로르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 그러나 이 괴로움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