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2007년 12월 주말부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부가 수도권 기업의 지방 이전을 계획하고 진척시키던 시기였다. 회사도 강원도 원주로 공장 이전을 계획하고 그해 12월부터 공장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사감독을 위해 문막에 숙소를 정해 놓고 아침은 자체 해결하고 점심과 저녁은 현장에서 해결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겨울이어서 매우 추웠고, 강원도 날씨는 더욱 매서웠다. 현장에서 3km 정도 거리에 섬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에서 부는 바람은 칼바람이었다. 휑하니 벌판만 있는 공사 현장은 더 을씨년스러웠으며, 공사 초기는 대부분 토목 공사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력 투입이 제한적이었다. 다음 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사가 이루어지며 2008년 12월경 에는 건물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외장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으며 내부 공사 마무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동시에 바깥에는 조경공사를 일부하고 있었다. 부지 내부에 심을 나무의 종류가 다양하였다. 대표적으로 자작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소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를 도면에 표시된 대로 심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처음 자작나무를 만났다. 이때만 해도 나무에 대한 지식이나 이름을 아는 나무라곤 사과나무, 배나무, 앵두나무, 매실나무, 밤나무 등의 유실수 정도였고 나머진 소나무, 전나무 정도였다. 처음 만나는 자작나무의 수피가 다른 나무들하고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2009년 3월 공사를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조경공사를 시작하였다.
잔디를 심고, 옥양목으로 정원을 구획하고 경계를 지으며, 목련과 주목 등의 수종을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전해진 지시는 공사감독과 나무 및 정원수 관리라는 과제가 하달되었다.
일반적으로 조경하시는 분들에게 질문하니 소나무가 이식하기에 제일 까다롭고 옮겨 심으면 몸살을 많이 앓는단다. 그래서 다른 나무보다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소나무에만 수간 주사가 놔진다. 다른 나무들은 놔두어도 잘 자란다고 하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는데 그해 6월부터 가뭄이 시작되어 8월까지 마른장마가 시작되었다.
조경업체에서 와서 병충해에 강한 약을 살포하고 물차에 물도 싣고 와서 수분 공급을 하였다. 그런데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녀석들이 속출하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공장 이전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틈나는 대로 물을 뿌려 주었다. 소나무가 예민한 나무란 말을 들은 적 있는지라 중점 관리 대상이었다. 정문 입구에 심어 놓은 자작나무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잎이 돋아나다가 말고 마르기 시작하더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관리업체에 전화하고 추후 대책을 묻자 죽은 녀석은 가을에 다시 다른 나무로 심어 놓겠다는 연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토요일에 회장님이 신공장을 방문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들어오시다가 죽은 자작나무를 보시더니 노발대발하신다.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나무가 죽었느냐고. 물도 수시로 주고 관리를 했어야지 목마르면 자네도 물을 마시듯 나무도 물을 충분히 주어 죽지 않도록 관리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씀하시는데 대거리 못 하고 천하잡놈이 되고 말았다.
( 속으론 그깟 나무하나 가지고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사달은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발생하였다. 회장님이 본사에 출근하셔서 원인과 대책을 내놓으라고 임원들에게 불호령을 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안절부절못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담당 임원의 연락을 받고 원인과 대책 그리고 협력업체와의 긴밀한 연락 등의 대책 문건을 작성하여 본사로 보고하였다. 대책이 마음에 안 드신단다. 경위서부터 쓰라고 하여 끙끙대며 경위서 작성 후 메일로 송부하였다. 다시 재작성 지시가 떨어지고 총 세 번에 걸쳐 경위서 파동이 종료되었다.
대책 문건은 의외로 조용히 지나갔다. 결국 문제는 경위서 또는 반성문이었는데 이를 간과하고 원인 대책을 세우란다고 덜컥 당해 문서만 제출하였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어른 모시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식은땀 나는 사건이었다. 이후로는 죽지 않도록 관리하고 협력업체를 채근하여 사달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다. 2009년 9월에 죽은 나무를 파내고 그 자리에 다시 자작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관리하였다. 근무하던 사무실에서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자작나무가 코앞에 서 있었다. 그해 10월 하순 밤늦게까지 일이 있어 야근하였다. 보름날이어서 달빛이 밝았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본 순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빛 아래 자작나무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순백의 피부를 하고 갈색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는 천상의 선녀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춤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춤추는 모습을 무엇에 비유하랴?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나무 때문에 고생하고 나무로 인해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느낌이 가득한 밤이었다.
자작나무는 목질이 가볍고 보드라워 조각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나무다. 칼끝이 나무 속살에 들어갈 때 칼끝을 받아 주는 느낌이 매우 부드럽고 칼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나무껍질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면 매끈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약용으로도 쓰인단다. 나무가 주는 수액도 시원하고 맛 난다. 버릴 게 없는 나무다.
자작나무가 좋아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 숲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1974년부터 1995년까지 만든 숲으로 약 69만 그루가 심겨있다.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에 이름을 올린 숲은 바람 부는 날엔 마치 자작나무 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내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란 이름이 붙었단다. 이곳은 한여름에 방문하면 녹색과 백색이 펼쳐진 정원을 감상할 수 있으며, 겨울에 보는 숲 또한 환상적인 자태를 보여 준다. 이 아름다운 숲은 언제 방문해도 정겹고 아늑하며 심신을 다독여 준다.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살아있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횡단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그 끝없는 벌판을 달려보는 것이다. 자연이 준 선물인 자작이 원 없이 끝없이 자라고 살아가는 시원한 전경을 한없이 눈에 담고 싶다. 끝없는 흰색의 기둥들이 주는 정연함을 머릿속 가득 담아주고 싶다. 간다면 겨울에 가고 싶다. 설원 가득 펼쳐진 원시의 자연에 자작의 백색이 어떻게 담겨있을지 궁금하다. 정말로 궁금하다.
202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