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아래로, 서민들의 삶
나는 싱가포르 한 달 살이를 떠났다. (결국 4달이 되었지만 말이다.) 2주 동안 여행 갔을 때는 관광지 주변의 숙소에서 묵었지만, 한 달은 숙소 비용이 만만치 않아 중심지와 먼 하루에 2만 원도 되지 않은 엄청 저렴한 방을 한 달간 빌렸다.
싱가포르에 도착해 우버 택시로 숙소로 이동했다. 내 숙소는 Toa Payoh에 있는 HDB(공공 주택)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노원구 중계동쯤에 있는 LH아파트라고 보면 된다. 택시 아저씨는 외국인 여행객이 갑자기
중계동 LH아파트로 가주세요.
하니 신기해하셨다.
잠깐 싱가포르 주택 시스템을 살펴보자면
싱가포르 사람들 약 80%가 HDB(공공주택)에 살고 있다. 나머지 20%는 민간주택에 산다. 싱가포르에서 민간주택에 산다는 건 부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가 주도해서 주택을 공급하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면에 민간주택에 사는 사람들만 집값 상승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어 격차가 심화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공공 주택은 보통 2~6억 정도이며 비슷한 크기의 민간 주택이 보통 10~20억 이상인 것을 고려해 매우 저렴하다. 그리고 나라에서 정부보조금도 나오고, 대출도 저렴하게 해 주기에 물가 높은 싱가포르에서 젊은 부부들이 비교적 쉽게 집을 마련할 수 있다. 한 번 임대하면 99년을 살 수 있어 그냥 내 집이라고 보면 된다.
공공주택 HDB에 들어가려면 3가지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해야 한다.
1. 부모와 같이 거주
2. 미혼의 경우에는 만 35세 이상
3. 결혼한 부부
이 때문에 간혹 위장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싱가포르 친구가 이야기해 주었다. (싱글보다 부부경우 혜택이 훨씬 많음) 내 친구의 경우 만 35세 이상 미혼으로 HDB를 마련했다.
택시 아저씨는 나에게 아는 싱가포르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1명을 안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가 말했다.
우리 아들을 소개해줄 테니, 아들한테 싱가포르 관광 좀 시켜달라고 해요.
택시 아저씨 인상이 너무 좋으시고 인자하셔서 별 의심 없이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타지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참 대담했다 싶다.
숙소에 도착했고, 내 생각보다 숙소는 처참했다.
방이 4개인 집을 셰어하우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내 방은 주방 옆에 창문도 없는 1평 정도 되는 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싱가포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건비가 저렴해 집에 상주하는 가사도우미를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공주택이라고 해도 방이 3개 이상 큰 아파트의 경우 아예 아파트를 설계할 때 주방 옆에 아주 작게 가사도우미방을 만든다고 했다.
내 방이 가사도우미 방이었던 것이다… 내 방 바로 옆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었는데, 집을 셰어하고 있는 사람들이 밤에도 낮에도 세탁기를 돌려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가사도우미 삶 간접 체험이었다.. 흑흑
몇 주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아파트 앞 작은 상가에 정말 긴 롤러코스터 같은 줄이 항상 있었다. 도대체 무슨 줄인 지 가까이 가서 보니 로또 비슷한 TOTO, 4D 줄이었다. 싱가포르는 집값, 교육비, 경쟁이 심해 많은 사람들이 '한 방' 인생 역전을 기대한다고 했다. 특히 저소득층은 로또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띠리릭!
우버 택시기사분의 아들이 연락이 왔다. 이름은 글렌이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압구정과 같은 '오차드로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2주 여행 왔을 때도 오차드로드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그전에 왔을 때와는 조금은 다른 풍경이었다. 일요일에 글렌과 만났는데, 백화점 앞쪽이나 큰 건물 1층에 많은 동남아시아 여성 외국인들이 길거리에 둘러앉아서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웃고 떠들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데모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글렌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들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고, 주 6일을 근무하고 일요일에는 이곳에 와서 다 같이 놀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 싱가포르는 최저임금이 없다.
그래서 싱가포르 사람들의 한 달 평균 수입이 한화로 650만원(전세계4위, 아시아1위)인 반면, 청소나 가사 도우미와 같이 3D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한 달 수입은 4-60만 원 정도다. 그 월급으론 비싼 싱가포르 물가에 식당에 가기 힘들다. 그래서 저렇게 바닥에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굉장히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기 때문에 일주일 하루 일요일에 저렇게 노는 문화를 굳이 막거나 제지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가장 비싼거리 오차드로드와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어 더운 날씨에 백화점 앞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외국인 노동자의 상반된 모습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글렌은 글렌의 아빠처럼 성격이 좋아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덕분에 글렌을 통해 많은 싱가포르 친구들을 사귀었다. 미국이나 유럽과 비슷하게 친구의 친구를 초대해서 같이 노는 문화가 있어, 쉽게 싱가포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좀 신기했던 건 글렌은 싱가포르 '중국인'이었는데 그의 친구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74%, 인도계 9%, 말레이시아계 13% 외국인 4%들이 같이 섞여 사는 다민족 국가이다. 하지만 막상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민족이 끼리끼리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끝나고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면 보통 같은 민족의 아이들끼리 어울려 걸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민족간의 소득 격차도 있다. 보통 중국계, 인도계가 말레이시아계보다 소득이 높은 편이다. 특히 말레이시아계는 중국계보다 35% 낮은 중위소득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낮은 자산 수준을 보였다.
싱가포르 친구들과 만나면 식당에 가기도 했지만 보통은 저렴한 호커 센터에서 저녁을 많이 먹었다. (호커 센터에 대한 설명은 후에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호커센터에서는 7-80세로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이 일하고 계셨다.
싱가포르에 7-80대에 일하는 노인들이 많은 이유는 노후에 국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이나 국민연금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퇴직 대비는 각자 알아서 개인 명의로 저축하는 철저한 자립형 모델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니 저임금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은 거의 돈을 모은 게 없어 노후 빈곤 비율이 정말 높다.
사람들은 저렴하게 밖에서 먹는 호커센터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도 치우지 않는다. 대신 남은 쓰레기를 두고 가면 일하시는 7-80대 노인분들이 다 치워주신다. 로봇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노인분들이다. 너무 마음이 아파 내가 대신 치우려고 하니 싱가포르 친구가 말렸다.
네가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자리를 뺐는 거야. 그냥 두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거야.
내가 2주 동안 여행을 할 때는 알지 못했던 삐까번쩍 싱가포르의 뒷모습을 보고 나니 이것이 싱가포르를 빠르게 동남아시아의 1등 부자나라로 만들어준 원동력인가 싶기도 해서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이 씁쓸했다.
HDB의 1평 가사도우미방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 로또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 일요일마다 도시락을 싸와 길거리에 앉는 노동자들, 그리고 70대가 넘어서도 일해야 하는 노인들...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 '아래로 아래로'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었다.
다음 화에서는 반대로 상속세가 없어 전세계의 부자들이 모이는 싱가포르의 '위로 위로', 부유한 삶에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과연 그 격차는 얼마나 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