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소리를 가장한 편지, 편지로 가장한 잔소리
어릴 때부터 7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고,
지금도 국영수보다 작곡을 좋아하는 아들은
예중 진학을 고민하다 결국 인문계를 선택한
한창 사춘기인 중학교 1학년이다.
지난 5월, 교육청과 회사 지원으로 학부모 대상 '자기주도 학습' 강좌에 갔다.
그때 강사님 말씀 한마디가 가슴에 꽂혔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책 읽는 습관이 들면 문해력이 생기고,
그것이 자기주도 학습의 기반이 됩니다.
글을 잘 읽고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아이는,
두발 자전거 배울 때처럼 처음만 살짝 밀어주면
스스로 앞으로 쌩쌩 달리게 됩니다."
'아, 이제라도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늦은 6월, 아들에게 말했다. "문해력이 중요하니까, 이제부터라도 책을 읽어볼래?”
아이가 고른 책은 『아몬드』 였다.
"1주일 안에 읽고 느낀 점 써서 보여줘~"
근데 이 결말, 다들 알 거다.
1주일 뒤, 책상 오른쪽 구석에 똑같은 위치, 똑같은 모양으로 놓여 있는 책.
한 페이지도 안 넘겨진 채.
'이렇게는 안 되겠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생뚱맞은 결론을 내렸다.
그래, 매일 밤 10분씩 아들과 그냥 수다를 떨자!
공부 얘기든, 게임이든, 욕이든, 뭐든 상관없이.
내가 이 대화를 어떻게든 문해력 향상으로 이끌어 보리라.
그렇게 18일 동안 AI, 영화, 힙합, 수학, 게임, 웹툰, 환경파괴, 독서, 탁구, 과학, 창세기, 숙제 등
온갖 주제로 대화했다.
어떤 날은 30분을 넘기고, 어떤 날은 5분도 버거워서 어색한 침묵만 흘렀지만,
그래도 두서없던 대화가 나름 '오늘의 레슨'으로 마무리되면,
속으로 '오, 나도 제법인데?' 하고 뿌듯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빠, 학교랑 학원 다니고 오면 너무 피곤해요.
당분간 아빠랑 이야기하는 거…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
'하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예상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왜 이렇게 아릿해지는 건지.
사실 대화 거리가 바닥나고 나도 지쳐가던 참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자위하며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그런데 다시 시작하려 한다.
사춘기의 아들과 교감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직접 말하는 대신, 편지로 해볼까 한다.
대화할 때처럼 바로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니 덜 피곤할 테니까.
편지는 종이가 아닌 카톡으로 전할 생각이다.
어차피 아이 손에 24시간 붙어 있는 게 핸드폰이잖아.
지금까지 "밥 먹었니?" "네" "학교 안 늦었니?" "네" 로 채워진 우리의 대화창에,
이제 아빠의 '잔소리를 가장한 편지' 혹은 '편지로 가장한 잔소리'들로 채워 넣으려고.
솔직히 말하면 마냥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조금은 숙제 같은 의무감도 든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결심한 바로 그 어젯밤.
아들이 와서 자기가 작곡한 곡을 들려주며 "아빠, 이 곡 어때요?" 한다.
어라??? 아싸!!!
이걸로 자연스럽게 첫 톡편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이 먼저 손 내밀고 만들어 준 이 기회를
나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