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발작

Question

by 김은채

인간은 살아가는 내내 수많은 물음들을 마주하고 고민한다. 호기심은 이성적 사고의 도구로써 가히 유용하다. 사과의 하강에 의문을 품자 만유인력이 탄생했고, 내세를 캐묻자 신화가 창조됐다. 물음표 정신은 오늘날까지 무한 우주에 순간의 빛일지라도, 창공을 향하는 희망으로 이어져 있다.


궁금증이 언어화되는 순간, 당연한 세계에 낯선 긴장감이 맴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늦추는 행위들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한다.


한데 운명이라 믿었던 사건들이 실은 단편적인 우연들의 곱에 불과하고, 인생에 의미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면, 생애를 바친 이 모든 작업이 환상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가?



정답은 없지만, 통상적으로 ‘인간은 존재 자체로 고귀하며 존엄하다’. 지극히 타당한 말이다. 모든 존재는 존재만으로 의미가 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논리적 이해가 반드시 충만함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자기 이해의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모름’을 계속해서 확인당한다.


이 격렬한 내적 동요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존재를 내몰고, 역설적으로 존재는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나는 이를 ‘존재의 발작’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질문은,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과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무지의 수용이라는 모순된 구조를 취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인식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가능한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확장한다. 그러나 이어진 열망의 끝에서 미지의 영역, 즉 무한성을 파악하게 된다.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이 깨달음은, 내재된 실존적 불안을 깨우고, 재차 앎을 향한 필사적 갈망으로 바뀌어, 기어코 우리를 질문 앞에 서게 한다.


끝없는 순환 구조에 갇혀, 우리는 한평생 다르지만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하여 모든 사유思惟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는 세상의 무의미를 직시하려는 용기와 부조리를 감당하려는 의지를 요구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 방황하는 한 확신에 찰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해답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가는 인간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또다시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한다.


외면하고 침잠할 것인가,

반응하고 저항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