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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해석과 용서의 지혜

by 신아르케

인생에는 이유 없는 고난이 찾아온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있다.

요셉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낯선 땅에 팔려가고,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치다 누명을 써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의 기근을 대비하게 된다.

그는 훗날 고백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창 50:20)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던 고난이, 인생의 뒤편에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억울한 일을 겪었다.

정직하게 살았음에도 타인의 질투와 오해로 인해 비난받은 적이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상대의 사과도 없었다.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만, 진정한 용서란 무엇인가?

진심 어린 회개 없이 용서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 앞에 머물렀다.

피해자에게 사과 없는 용서를 요구하는 일은,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일본이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 “미래로 나아가자”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도 같다.

용서는 ‘좋은 게 좋은 것’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회개와 사과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분노와 억울함을 오래 품고 사는 것도 자신을 해친다.

행복은 결국 마음의 평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사건이 오히려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때의 고통이 나를 브런치 글쓰기로 이끌었고, 그 글쓰기가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고통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는 과정이었다.


사람은 스스로의 굳어진 패턴을 바꾸기 어렵다.

때로는 외부의 충격이 우리를 성장의 길로 밀어낸다.

변화는 고통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 준다.

요셉이 감옥에서 배운 인내와 지혜가 이집트를 구한 것처럼,

나 역시 억울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사명을 발견했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를 전제로 하지만,

내면의 평화는 그보다 먼저 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용서란 가해자를 면죄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원한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정의는 끝까지 추구되어야 하고,

관계의 회복은 회개 이후의 몫이지만,

내면의 자유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다.


고난은 처음엔 저주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축복의 흔적을 남긴다.

요셉의 삶이 그 증거이고, 내 삶 또한 그 증거이다.

억울한 사건과 고통의 순간조차, 하나님께서는 성장의 재료로 바꾸신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믿는다.

정의는 끝까지 추구하되, 원한은 내려놓자.

가해자의 회개가 없더라도, 나는 내 마음의 자유를 선택하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고난이 나를 더 성숙한 존재로 이끄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리라.


고난은 내 영혼을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학교이며,

용서는 그 학교를 마치고 얻는 진정한 자유의 졸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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