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신.
'수오재기'라는 글, 들어본 적 있어? 수守는 지킨다는 뜻이고, 오吾는 '나'라는 뜻이야. 즉 수오守吾는 '나를 킴'이라는 뜻이지. 재齋는 조금 드물지만, 서재書齋에서처럼 방이나 집을 뜻할 때 쓰는 단어고, 기記는 여기에선 탐방기같이 무언가를 보고 생각한 바를 적는 글을 말해. 소감문 같은 거지.
그러면 '수오재기'가 무슨 글인지 알겠어? 수오재를 보고 떠올린 걸 적은 글이란 거지. 그리고 수오재는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뜻이고.
장황하게 시작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나를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거야. 정약용은 수오재기에 환경과 욕심에 휩쓸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자기가 이렇게 유배를 오게 되었다며, 자기가 누군지를 잊지 않고 본질적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썼어.
내가 수오재기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생 땐데, 국어 공부를 하면서 만난 글이지만 무척 감명 깊어서 수업 시간 내내 선생님을 무시하고 혼자서 감상을 되새김했던 기억이 나.
학원이란 건 무척 힘든 곳이야. 교육열이 높은 곳일수록 아이를 옥죄며 그 갑갑함은 어릴수록 견디기 힘들어져.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학원에서 보냈어. 학교에서 지낸 시간과 학원에서 보낸 시간이 비슷할 정도였지. 좁은 방 안에서 열 명이 좀 넘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몇 시간이고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면, 뇌가 빠져.
정말 거짓말 안 하고 뇌가 녹아서 흘러내려 귀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어. 학원을 다닐수록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고, 마음도 몸도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시들시들해진다는 것만이 똑똑히 느껴지지.
학원 같은 거 나랑 안 맞다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때려친 건 정말로 살기 위한 선택이었어.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아.
무엇을 지키는 것이 큰가? 몸을 지키는 것이 크다. (수숙위대守孰爲大? 수신위대守身爲大.) 수오재기에서 정약용이 맹자를 인용하며 한 말이야. 몸이란 건 좁게 보면 신체, 목숨이지만 넓게 보면 나를 나답게 하는 모든 것이지.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없으면 신체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야?
실제로 나는 나를 잃자 목숨도 잃고 싶어졌으니, 정약용의 말이 진실로 맞아. 일단은 몸을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지켜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 나는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나를 지키려고 했고, 그래서 학원을 다니는 생활에서 도망친 거야.
하지만 이 선택은 내게 두려움을 남겼어. 아니, 두려움'들'을 남겼지.
나를 지키기 위해 도망쳤다는 것, 낭만적일 수도 있지만, 도망쳤다는 건 내가 지낼 수 있는 곳이 하나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해.
만약에 내가 또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또 도망가야 한다면 어떡하지? 계속해서 도망치다 보면 내가 발붙일 곳이 남아 있긴 할까? 그런 생각에 어떻게든 여기서 버텨야 한다며 나를 몰아붙이게 되고, 그러면 더 빨리 나를 잃게 되고, 싫은 일을 계속하다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어 버려.
이미 한 번 도망친 사람에게 또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은 기댈 곳이 없다는 말이지. 수오재를 지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은 자신의 집을 기댈 곳으로 삼아 편안하고 단정하게 앉아 지냈지만, 아직 안심하고 기댈 곳을 찾지 못한 나는 무엇으로 나를 지켜야 할까.
지킨다는 건 참 힘든 일이야. "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정작 그걸 실현하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해. 그나마 도망치는 건 가장 쉬운 축에 속하지. 나를 지키기 위해 주위를 바꾸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지금 내가 놓인 건 아닐까, 종종 한밤중에 이런 생각이 들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똑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더라도 한 푼도 저축 못한 것과 조금이라도 버틸 돈이 있는 건 하늘과 땅 차이잖아.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기댈 곳이 있는 것과 없는 것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야.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길을 확보해 뒀다면 뭘 만나든 겁나지 않겠지만, 외나무 다리를 건널 때는 맞은 편에서 바퀴벌레가 오는 것마저도 견딜 수가 없는 걸.
그래서,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면 어떡할까, 실제로 못 도망치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잡고 있는 동앗줄이 유일한 동앗줄인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저 바닥은 사실 날카로운 수숫대로 가득한 것 아닐까, 끝이 보이지 않는데 이제 뭘 더 참고 견뎌야 할까, 그런 두려움에 나를 지킬 수가 없어.
또 다른 두려움은 지키는 방법이 아닌, 나에서 비롯돼. 국어 시간에야 수오재기가 말하고자 하는 건 '본질적 자아'를 지키는 거라고 했지만, 그래서 본질적 자아가 뭔데?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그때그때의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네가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것, 네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며 행동해라"라는, 참으로 듣기 좋고 유용한 조언이지만 이건 실제로 네가 무엇인지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아. 또 실제로 어떻게 나를 지켜야 하는지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지.
학원을 다닐 때의 나를 다시 떠올려 보자. 내가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게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좋은' 삶을 사는 거라면, 나는 당장의 고난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충동' 대신 그걸 견디고 이겨내 내가 이루고 싶은 나를 지켜야 할 거야.
그러나 내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게 현재의 내 모습을 지키고 나를 몰아붙이지 않으며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은 거라면, 정말로 사소한 '충동'을 이겨내고 꿋꿋이 학원을 다녀야 할까? 애초에 두 욕망 중에 뭐가 나고 뭐가 남이지?
나를 잃지 말라는 조언은 정말로 심금을 울리지만, 내가 무엇인지를 내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면 반쪽짜리 조언일 뿐이야. 나는 순간의 '충동'을 따라 행동했고, 그렇게 행동한 내가 진짜 나라고 여기기로 했어. 그러나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내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겠지.
지금의 나는 '지금까지의 나'를 지키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 어떻게든 마음과 시간에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그 여유를 바탕으로 즐길 걸 즐기고 만들고 싶은 걸 만들지. 이런 목표 덕분에 글을 쓸 수도 있게 되었고 말이야. 그러나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희생한 것들을 나중의 내가 아까워 하진 않을까?
애초에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잖아.
옛날엔 싫어하던 음식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좋아하던 취미에 정이 식을 수도 있지. 사람 사이의 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고. 내가 지금 이토록 소중히 지키고 있는 '나'가 나중에는 조금의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지금 지키고 있는 건 뭐지?
나는 어렸을 때의 경험 이후로 두 번 다신 나를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 과보호하는 부모처럼 나를 비싼 접시 다루듯이 다뤘지.
그러나 사방에서 지금의 나로는 이겨낼 수 없는 압박이 들어오는 지금, 과연 내가 더 이상 나를 지킬 수 있는지, 애초에 지금까지 지켜오던 것이 나는 맞는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두려움으로 가득할 뿐이야.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고 싶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지만 모든 방황하는 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두 대문호의 말을 빌려서 말이야.
나는 지금의 나를 지킬 거고, 그렇기에 한 치 앞의 미래를 모른 채 방황하듯 나아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갈 길을 모르는 건 아니야. 오히려 누구보다 확실한 길을 알고 있지. 바로 나를 지키는 거야.
그러니까, 이 글을 읽고 혹시 너도 '나'를 잃은 것이 아닌지, 아님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면 마음을 다잡고 결단을 내리기 바라.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지금의 결단은 내린 것도, 그걸로 만들어진 것도 모두 '나'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