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 미련이 엄청나게 크고 대단해야 하는 줄만 알았어요. 예컨대 목숨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사랑 뭐 그런 것들이요. 이전에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은 그런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H 말대로 나를 알아주는 회사, 내 글을 기다리는 독자, 내 안녕을 빌어주는 몇 명 같은 작은 미련들이 조금씩 모여서 살아가는 거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해요. 그러니까 그 작은 미련들이 조금만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러면 정말로 죽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ㅡ 「여행에세이 그거 엏떡해쓰는건데요?」 16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중
오랜만에 돌아간 회사는 조금 다른 듯하면서도 여전했다. 너도나도 “마른틈 씨가 없어 너무 조용했어~”라고 말하는 통에 내가 이곳에 입을 털러 오는 건지 일을 하러 오는 건지 잠시 헷갈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이나 털었다.
우리 대표님은 내가 재잘거리는 게 아주 듣기 좋다고 하셨으니까. 어디서 듣자 하니 대표님의 멘탈 케어만 잘해도 1인분은 충분히 하는 거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입만 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으니 일도 잘하겠다고 다짐한다.
여행지에서 산 ‘예쁘고 쓸모없는 것’들을 자리에 잔뜩 비치해 두었다. 어느 글에서 조금 싫어하는 공간이라도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워두면 곧 좋아하는 공간이 된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비록 “일주일에 7일 내내 출근해도 좋겠다”는 말에 과장님이 조금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으니, 내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으나, 좋아하는 공간에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두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회사에 돌아온 직후, 대표님은 편지를 읽고 우셨다던 것이 무색하도록 눈에 불을 켜고 나를 굴려 먹고 있기에 조금 진이 빠지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그와 손뼉을 마주치고 있다.
성격이 급하고 욱하는 성미를 지닌 우리 대표님은 뒤끝이 없고 사과도 아주 잘하신다. 사실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서운해 본 적이 없는데, 혼자 화내고 혼자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너무 웃기고 귀엽다.
나는 종종 “아~ 제가 빨리 대표님 경쟁사 차려서 거래처 흡수해 가야 하는데~”하며 능청스럽게 구는데, 그러면 대표님은 “이 호랑이 새끼를 어떻게 하노…”라고 투덜대면서도, 이내 신이 나서 본인의 지식을 설파하신다. 나는 그런 대표님을 보면서 슬며시 웃고는 빨리 커서 그에게 힘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조용히 삼킨다.
“수입, 수출의 왕을 만들어주겠다”던 그의 바람이 곧 나의 바람이므로, 나는 이제 언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중국지사 직원들과 소통하려니 번역기가 영 멍청해서 거슬리지 않겠나. 아아, 하오더. 쒜쒜.
나는 이 여행 에세이의 시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웨스트만 제도에서 레이캬비크까지 사흘 반나절 동안 약 1,000킬로미터를 주행했다는 사실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가보지도 못할 여행지의 정보 같은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마치 봄에는 산으로, 여름에는 바다로 떠나자고 말하듯, 중국으로 일본으로. 추울 때는 따뜻한 오키나와로, 조금 고단할 때는 다 함께 별이 쏟아지는 몽골로 떠나자는 대표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어차피 가보지도 못할 것’이라 지레 포기했던 레이캬비크도, 아름다운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를 보기 위해 떠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떠나던 날, H는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작가님, 나는 제주도 초콜릿 좋아해요.
감귤 초콜릿, 백년초 초콜릿. 그거 몇 개만 사다 줘요.
우리 만나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면서 같이 먹어야 되니까.
그리고 제주에서 예쁜 풍경 사진 좀 찍어서 보내줘요.
수채화를 그려 엽서를 만들어 작가님에게 편지 쓰려고요.
제주를 20년도 더 전에, 고등학생 때 가보고 못 가봤어요.
거기서 맛있는 거, 좋은 거 몽땅 눈에, 입에 다 넣고 와요.
그리고 나한테 전부 얘기해 줘요. 나도 나중에 꼭 가보게.
여행 에세이 꼭 멋지게 마무리해 줘요.
언젠가 당신이 책을 내게 된다면 그 안에 내가 그린 그림을 삽화로 하나만 넣어줘요.
작가님이랑 콜라보하고 싶어요.
작가님은 요즘 나랑 가장 많이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꼭 무사히 돌아와요. 내 친구를 뺏지 말아 줘요.
무서울 땐 언제든 전화해도 돼요. 새벽이라도 괜찮아요.
새벽 3시든 4시든 친구끼린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알겠죠?
처음 혼자 자는 건 누구나 다 무서울 수 있어요.
작가님은 지금 어린 시절의 작가님을 보살피는 중이잖아요.
그래서 당연히 무서워도 되는 거예요.
언제든 어린 시절의 작가님에게 다정하게 대해줄게요. 안심하고 연락해요.
만약 아무런 일 없이 밤을 잘 보냈다면 축하할 일이니까 그것도 얘기해 줘요. 꼭.
나는 그녀의 편지에 어떤 답도 하지 못한 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 내내 다른 이들과는 잘도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어쩐지 복잡한 마음에 H와는 연락하기가 여간 어려웠다.
다만 나는 조금의 사진을 찍었다. 풍경도 없이 침잠하는 물결뿐이던 화면은 점차 하늘과 바다로 옮겨갔다. 이내 움직이는 갈매기와 닭, 강아지. 붉고 예쁜 동백, 돌아가는 바람개비, 아름드리 져가는 노을과 어떤 바람이 담긴 돌탑들까지.
들이차는 웃풍을 눌러내는 구들방 같은 다정 속에서 나는 언젠가 그녀와 이 제주에 함께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작 초콜릿이나 사다 달라는 말이, 그렇게나마 내게 마음의 짐을 지워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당신의 소망임을 모를 수 없어서, 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언젠가 꼭, H와 제주에 함께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아주 동안이니까, 우리가 같이 다니면 정말 친구처럼 보일 거예요.
그렇게 여행을 오면 나 꼭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도, 당신도 각자의 여행 에세이를 펴는 거예요. 나는 글을 쓸게요. H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요. 그리고 우리 서로에게 편지 형식의 글을 주고받아요. 어때요? 아주 멋진 콜라보레이션이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 정말 소름 돋았어요.”
나는 조금 웃으면서 “언제가 됐든 기다릴게요”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내게 이번 여행 에세이 끝에 이렇게 말해왔다.
“바쁜 일정 속에서 글을 따라가며 작가님의 하루를 함께 걷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 안에서 보여지는 제주의 맛과 작가님의 생각을 고스란히 느꼈고요. 아마 작년 6월쯤부터 작가님의 글을 읽었던 것 같은데… 글을 읽을수록 점점 탄탄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억지로 만들어낸 성장이 아닌, 시간과 경험으로 차곡차곡 쌓인 느낌이라 더 멋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 것 같아요”
나는 그녀에게 조금의 불확실성을 담아 물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인연과 감정은 접어두고, 제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은 독자로서, 이 이야기가 단순한 징징글 이상의 가치가 있었나요? 돈값을 했을까요?”
그녀는 단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웹툰도 브런치도 결제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돈이나 절차가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 대답으로, 나는 오래 미뤄두었던 고민을 마침내 매듭지었다.
나는 결국 이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비록 전처럼 거창하고 대단한 의미를 찾아가는 삶은 아니겠지만 조금 맛있는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 보고 싶었던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가끔의 다정에 뿌듯해하며 적어 내려간 글이 어떤 이의 마음에 닿는 소소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멋진 대표님, 그리고 다정한 동료들과 함께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 더는 임시로 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 많은 것을 배우고 공부하는 삶을 살아보려 한다. 그러다 잠시 지친 어느 날에는, 무작정 ‘도망’쳐오라던 나의 단짝 친구가 보고 싶어질 테다. 다정한 H와 멋진 콜라보레이션도 포기할 수 없겠다.
그리고 나의 길고 긴, 어쩌면 조금은 지루한 이야기들 또한 이제는 물성으로 존재해야겠다.
아, 작고 작은 미련들이 모여 나는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조금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따라와 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조금 괜찮은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이요.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천히 준비 후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