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체가 뭐냐.
[SYSTEM NOTICE] 오늘의 레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참가 보상: 골드 12,800 / 경험치 40,000
[길드 채팅방]
부릅뜨니숲이었어: 와,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82세박춘배할아버지의마지막한타: 오늘도 짭짤하네요! 이게 다 두팔형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곽두팔이: 어야, 수고 많았다 내일 보자.
두부한모만사주세요: 들어가십쇼 형님. 푹 쉬세요!
부릅뜨니숲이었어: 들어가세요~
얼마 전 새로 패치된 레이드를 동료들과 함께 점령한 지 일주일 차. 매일 이어지는 숙제와도 같을 보스를 공략하는 것은 이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여전히 버벅대는 파티원들을 어깨에 이고 지고 꾸역꾸역 살아남는 것은 꽤나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지만, 인간사 현실이든 게임이든 새로 생긴 콘텐츠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곧 돈이고 가치 창출인 것이다. 그런고로 지난주 화요일 패치 이후부터 그와 동료들은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고된 루트를 이어가고 있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시. 출근을 앞둔 여느 직장인에게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급히 컴퓨터를 끄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이는 곽두팔씨의 손이 작고 가녀리다. 그렇다. 곽두팔씨는 여자다.
곽두팔씨가 처음부터 곽두팔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귀여운 것이라면 일단 수집부터 하고 보는 앙증맞은 취향에, 단숨에 시선을 끄는 미성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의 유일한 취미가 게임이었을 뿐이다. 그녀는 익명성 뒤에 숨은 욕망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초반에 숱하게 많은 일을 겪었다.
귀여운 닉네임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캐릭터. 무심코 내뱉던 “~용?”같은 둥글둥글한 말투. 그녀는 누구에게도 실제 성별을 밝히지 않았으나, 그녀가 여성임을 누구도 모를 수는 없었다. 총질을 하랬더니 별안간 “여자야? 어디 살아?”따위를 묻다가 멍청하게 대가리가 터지는 전장의 동료라던가, 어느 날 갑자기 호의라는 이름으로 건네주던 것들을 들먹이며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라고 묻던 길드원이라던가. 그저 한자리에 *리젠되는 몬스터를 잡고 있었을 뿐인데, 불쑥 나타난 어느 캐릭터가 나타나 성희롱을 늘어놓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로 게임을 못 할 거라 여기며 파티에서 제외되는 일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때때로 게임 내 레이드를 핑계 삼아 보이스톡을 걸고, 기어이 전화번호를 캐묻기도 하는 것이다. 신물이 나도록 목적이 뻔한 그들을 피해 잠적해버리는 일에 진저리가 난 그녀였다.
그러니 언젠가 [봄여솔] 따위의 닉네임을 사용하던 그녀가 [곽두팔이]가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그것이 비록 배달 음식을 시킬 때 혼자 사는 여자인 것을 감추려 사용하던 닉네임일지라도 말이다.
러블리은지: 움… 강화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네…
너만을바라볼꺼야: 우리 은지 골드 모자라? 걱정 마, 오빠가 줄게 ㅎㅎ
러블리은지: 앗! 아니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돼요…
너만을바라볼꺼야: 아니야~ 부담가지지 마, 은지가 빨리 커야 오빠랑 재밌게 레이드도 다니지! 얼른 커서 오빠 힐 해줄거지?
러블리은지: 힝… 그래두 괜찮은데… 감사합니닷! 빨리 커볼게요^^
[SYSTEM = ‘너만을바라볼꺼야’ 님이 ‘러블리은지’ 님에게 30,000 Gold 을(를)우편으로 발송 했습니다.]
[SYSTEM = ‘러블리은지’ 님이 우편함에서 30,000 Gold 을(를) 수령했습니다.]
“아, 이번에도 공짜 강화 성공했네. 개꿀ㅡ”
여기 후련한 표정으로 길쭉한 기지개를 풀어 헤치는 러블리은지씨는 남자다. 컵라면으로 대충 허기를 달래는 그의 현실은 제법 초라하지만, 게임 속 [러블리은지]는 부족할 것이 없다. 외형도 예쁘지만 버프 효과까지 붙은 한정판 의상에, 파티 사냥에 필요한 강력한 무기까지. 그 무기를 강화하기 위해 소모될 자원조차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언제나 말끝을 흐리며 부족함을 내비치면 [너만을바라볼꺼야] 형, 아니 오빠가 아낌없이 퍼주었으니까.
은지씨 또한 처음부터 [러블리은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왔으나, 피치 못할 사정과 번번이 비껴가는 운이 무심하여 퍽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단한 일과가 끝나고 간신히 남는 한두 시간의 여유에 할 수 있던 것은 아무래도 게임뿐이었다. 밖에 나가서 새로운 취미를 즐기거나,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숨만 쉬어도 빠져나갈 공과금을 세 알리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당에, 여유롭게 돈을 쓰며 노닥거릴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게임은 달랐다. 물론 약간의 전기세는 들겠고, 각종 재화를 캐시로 구매해야 하는 BM이 판을 쳤지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다. 자기만족에 그치는 선이라면, 게임은 그에게 무료로 도파민을 쥐어주는 최고의 가성비 취미였다.
그의 인생은 노력한다고 해서 썩 달라지는 것이 없는 참담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게임 속에서만큼은 공들인 만큼 확실한 결과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뿌듯했다. 가끔은 삶이 게임만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비록 시간과 자원을 모두 쏟아붓는 고래 유저들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의 캐릭터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봄여솔]이라는 유저가 길드에 들어왔다. 그녀는 길드에 합류한 지 얼마되지 않아 놀라울 만큼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은지씨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그곳의 공기를 모를 수 없었다. “캐릭터가 귀엽다”며 그녀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길드원들과 “환영한다”는 명목으로 건네지는 각종 아이템 재화. 은지씨가 그들과 함께 레이드에 참여하고 싶어 스펙컷을 맞추기 위해 아이템을 손수 *파밍 하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오다 주웠다”는 말과 함께 그녀에게 쉽게 흘러가는 장비들. 남자인 은지씨는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호의였다.
그 순간 은지씨는 게임 속에서만큼은 공들인 만큼 확실한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명제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그저 주어지는 것들도 있는 거였다.
그리하여 은지씨는 그날부터 [러블리은지]가 되었다. 닉네임을 바꾸고, 귀여운 캐릭터를 꾸며 길드에 들어가기만 해도 수많은 관심이 쏠렸다. 그중 적당한 사람을 골라 곰살맞게 굴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선만 그어주면 되었다. 실로 누군지 모를 오빠들에게 쏠쏠히 받아 챙기며 필요한 것은 사용하고, 필요 없는 것은 몰래 처분해 그의 삶의 양분으로 만들기가 거리낌이 없었다.
곽두팔씨와 러블리은지씨는 게임이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융은 이러한 외적인 자아를 ‘페르소나’라 정의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필요에 따라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다른 얼굴을 꾸며낸다. 그 가면은 어느날에는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되고,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러블리은지씨는 봄여솔씨가 부러웠다. 그녀는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호의를 얻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허나 그 호의는 봄여솔씨에게 늘 불편하고 버거운 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끝내 곽두팔이라는 가면을 쓰고 만 것이다.
결국 모든 관계란 이토록 모순적이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또 다른 이는 보상을 위해 가면을 쓴다. 같은 상황도 누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관계는 끊임없이 재창조된다. 하여 우리는 그 줄다리기 위에서 끝없는 힘겨루기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 웃지 못할 이야기는 결코 게임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상황과 위치에 따라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허락하는 만큼 관계를 쌓아 올린다. 문제는 가면이 본래의 얼굴을 잠식하는 순간 정체성의 혼란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 싶은 나’를 억지로 꾸며내는 것보다 그 모습이 진짜 내가 되도록 성장하는 일이다. 그때 비로소 관계는 가면 뒤가 아닌 서로를 마주하는 상호성 위에서 흐를 수 있을 테니.
[길드 채팅방]
러블리은지: 두팔오빠 오늘도 버스 고마워요!
곽두팔이: 에휴… 오빠는 무슨, 사실 나 여자야.
러블리은지: ?? 야 너두?
곽두팔이: ??
러블리은지: 사실 저도 남자예요, 누님.
[SYSTEM: 곽두팔이님이 게임을 종료하였습니다]
러블리은지: ……?
[SYSTEM: 파티가 해산되었습니다]
*리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같은 장소에 다시 나타나는 몬스터나 아이템.
*파밍: 게임 내에서 필요한 아이템이나 재화를 반복적으로 얻기 위해 사냥이나 활동을 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