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로 쌓아 올린 지구의 이야기

지구도 일기를 쓴다

by 지온

오래된 일기장을 펼치듯


낡아 바랜 아빠의 어린 시절 일기장을 들춰 보던 아이가 묻는다.
“아빠는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먹었어? 그런데 그게 하나에 50원밖에 안 했다고?”

아이는 둘 중 어떤 것이 더 놀라웠을까?


일기장은 사소한 기록 속에서도 시간을 가로질러 이야기를 전한다.
빙하도 그렇다. 눈이 녹지 않고 쌓이며 다져진 얼음 속에는 오래 전의 흔적이 보존된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페이지가 되어, 지구의 일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얼음 속 페이지


빙하는 단순한 얼음덩어리가 아니다. 눈이 내릴 때 공기와 먼지가 함께 갇히고, 그것은 얼음 속에 기록으로 남는다. 연구자들은 빙하를 세로질러 시추해 원통형 얼음 기둥, 빙하코어를 뽑아 올린다. 그 얼음은 마치 지구가 허락한 타임캡슐이다.

%ED%8A%B9%EC%A7%911-%EA%B7%B8%EB%A6%BC4-1.jpg?type=w3840 빙하코어 시추. 극지연구소 제공

빙하코어의 깊은 층으로 갈수록 더 오래된 눈이 다져져 있다. 표면 가까운 층은 어제와 오늘의 계절을 담고, 남극 내륙 깊은 곳의 얼음은 백만 년 전의 바람과 기온까지 품고 있다. 그 안에서 과학자들은 계절의 호흡과 화산의 흔적, 바다에서 실려온 소금기와 대륙에서 날아온 먼지, 오래도록 얼음 속에 잠들어 있던 작은 생명의 흔적,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낸 온실가스와 오염물질까지, 지구가 써 내려간 겹겹의 기록을 읽어낸다.


다른 일기장들


지구는 빙하 말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바다와 호수의 퇴적물, 동굴의 종유석, 나무의 나이테와 산호의 골격. 모두가 오래된 일기장이다.


빙하코어의 특별함은 기록의 세밀함에 있다. 바닷속 퇴적물은 수천 년에 한 장의 기록을 남기지만, 빙하는 몇 달, 몇 해 단위로 페이지를 남긴다. 누군가는 열 장의 종이에 열흘 동안 매일 기록을 남기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달에 한 번씩 십 개월을 기록하는 것과 같다. 두 일기 모두 소중하지만, 빙하는 더 가까운 호흡으로 지구의 변화를 적어 내려간다.


작은 기록 속의 큰 세계


어딘가의 빙하에서 뽑아 올린 빙하코어는 단순히 그 지역의 기록만이 아니다. 빙하를 품은 대륙 전체, 더 나아가 전 지구적 변화의 흔적까지 겹겹이 새겨져 있다.


아빠의 일기에서 “아이스크림을 세 개 먹었다”는 문장은 개인의 기록이지만, “아이스크림 값이 50원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의 물가를 반영한다. 작은 기록 속에 개인과 사회의 역사가 함께 새겨지듯, 빙하도 마찬가지다. 눈송이의 기록 속에는 눈 내린 지역의 이야기와 더 큰 지구의 이야기도 동시에 담겨 있고, 연구자들은 두 이야기 모두에 귀 기울이다.


날짜 없는 일기


그러나 지구가 빙하에 쓴 일기장에는 날짜가 빠져 있다. 과학자들은 여러 단서를 모아 얼음이 눈송이였던 시점을 복원한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눈의 화학 조성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주기적인 무늬를 남기고, 화산 폭발로 날아온 물질은 시간의 북마크처럼 특정 시기를 표시한다.


이런 단서들을 이어 맞추면 얼음 속 기록에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극지연구소가 남극 장보고과학기지 인근에서 2014년에 시추한 210미터 길이의 스틱스(Styx) 빙하코어는 약 2,000년의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 얼음에는 핵실험이 남긴 낙진, 산업화로 대기 중에 퍼진 중금속, 급격히 늘어난 온실가스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지구의 역사로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인류가 지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시대의 기록이다.

image01.png 남극 스틱스(Styx) 빙하 시추 캠프. 극지연구소 제공


공저자가 된 우리


선대와 후손이 시간을 달리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간, 지구를 더 잘 알기 위해 우리는 빙하에 적힌 일기를 읽는다. 빙하는 매해 새 눈을 받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 기록에는 이제 자연의 계절과 바람뿐 아니라 인류의 흔적도 짙게 스며든다.


내일 내릴 눈에 무엇이 새겨질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독자가 아니다. 이미 우리의 문장이 얼음 속에 새겨지고 있다. 지구의 일기장을 함께 써 내려가는 공저자로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지 지금 이 순간도 결정하고 있다.


이 글은 《극지인》 24호(2018년 12월)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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