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기를 바라는 사람과 차별받기를 바라는 사람
신분과 계급이 존재했던 과거 봉건사회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유의 발원은 대부분 '소비', 즉 소유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한다.
만약 당신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덕이 있어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당첨금액이 100억 원이라고 했을 때, 무엇을 가장 먼저 할 것인가? 사실 답은 벌써 나와 있다. 우선순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먼저 내 집을 마련하고 낡은 자동차를 새 자동차로 바꾼 후, 그동안 갖고 싶어도 돈이 없어 사지 못했던 명품 아이템을 장만하고, 해외여행을 떠난다.’이거나 ‘어디 가도 느낌 나는 외제차를 한 대 뽑고, 전원에 집을 지은 후, 해외여행을 가서 그곳에서 최신 명품 아이템을 장만한다.’는 식의 답변이 대다수를 차지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은 부자의 개념은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사전 상의 정의와 동일하다. 그리고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의 주택, 자동차, 의류, 액세서리 등을 소유하길 원하며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부를 표출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들의 부를 소비를 통해 과시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가 필요하듯이,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짝사랑을 예로 들어보려 한다.
나에게는 현재 미래를 약속한 정인이 있다. 으레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상대에게 보다 멋있고 상냥하게…… 아니, 한 마디로 요약해 좋은 모습만 보고 주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일 것이다. 내가 그녀를 짝사랑할 때의 마음도 그러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어떤 옷을 입고 그녀를 만나러 나갈까' 혹은 '그녀를 만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등에 대해서 사색하다 잠이 들곤 했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완벽했다. 이제 것 생각했던 대로만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녀도 분명 나의 매력에 빠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감으로 무장을 한 나는 고백을 결심을 결심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운명의 날을 맞았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복사꽃 만개한 미소를 흩날리며, 나에게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계획대로라면 그녀의 인사를 송중기 마냥 부드러운 미소를 발산하는 것으로써 되돌려 줘야만 했다. 그러나 응팔이의 택이 아버지와 같은 무뚝뚝한 말투와 극도로 경직된 표정 등은 나를 녹슨 로보캅으로 만들었다. 선득 내게로 다가올 듯했던 봄의 기운은 되레 시간을 역행하고 있는 듯했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변해 버린 이 분위기를 당장이라도 타파하려는 마음은 굴뚝과도 같았다. '이러면 안 돼! 안되는데…'라고 마음은 끊임없이 소리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가했다.
이처럼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말을 하거나 행동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행동은 부끄러워서도 아니요, 그렇다고 소위 밀당이라 일컫는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 낸 무의식적 행위이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의 무관심, 즉 짝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관심법과 같은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사랑도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같은 신통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짝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혹시나 모를 이별에 항상 준비를 하고 있다. 이를 테면,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사내아이의 행동처럼 사랑의 정서와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 하였을 때,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보며 "그래, 내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아닌 게 분명해. 만약 정말 사랑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지"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행위를 일러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라고 말한다.
그럼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왜 자신들의 부를 소비를 통해 과시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재테크에 관한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심지어는 전문가라는 사람을 만나 상담을 받고 펀드와 같은 금융상품에도 가입도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삶은 그때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 주름과 흰머리 그리고 나잇살만 늘었을 뿐, 사실 살림살이는 그다지 나아진 게 없을 듯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서는 경제가 어렵다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떠들어 대지만, 정작 우리들 주위에는 새로 산 명품가방을 자랑하는 친구와 외제차를 구입한 대학 선배 그리고 1년에 두어 번은 꼭 해외여행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직장동료가 득실댄다. 막상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 편이 답답해 오고 것이 한 잔 술이 절실히 생각난다. 담배 연기처럼 길게 내뿜는 한숨을 안주 삼아 술잔을 들이키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잘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한 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누구보다 잘살아 보겠다는 집념 하나로 아끼고 저축했지만, 부자는 고사하고 행여나 남들처럼도 못 살아 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에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이유로 열등감이나 자괴감에 빠져 불안해하거나 초조해질 필요는 없다. 결코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잘 나가지 않는다. 그저 소비에 대한 욕구가 당신에 비해 보다 과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정신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 일지도 모른다. 영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애드리언 펀햄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또는 우울할 때, 그리고 화가 났을 때에 더욱더 충동적으로 소비를 하게 된다고 한다. 당신이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정서적 불안을, 그들도 앞서 다른 누군가를 통해 먼저 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떨치기 위한 수단으로써 소비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 현실을 왜곡하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기 위해 행해지는 방어기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소비의 어떤 요소가 불안한 해소시켜주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바로 특별함이다. 무대 위의 모든 배우가 주연을 꿈꾼 듯이 우리도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매력이 있다는 의미요, 나아가 인기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답고, 지적이며, 또한 세련되어 보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예쁘고, 지혜 로우며, 패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매력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항상 부족한 존재로 생각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유년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우리를 보며 늘 '착하다', '예쁘다', '똑똑하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는 동네 아주머니들도 이런 부모님의 말씀을 거들며, '어딜 가도 사랑받겠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자 선생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무관심하셨다. 멜빵바지에 나비넥타이를 한 철수와 미미공주처럼 옷을 차려입은 영희를 보며, 예쁘고 잘생겼다며 관심을 가지셨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쁘고 잘생긴 것도 모자라 공부까지 잘하는 두 사람에게 끌리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나란 존재에 대해 그저 뭇사람들처럼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똑- 똑- 똑-' 처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낸다고 했던가. 시간이 흘러 사회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연은커녕, 조연도 될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다 보니 중간도 아닌, 그 이하의 존재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감은 점점 사라져 가고, 결국 또다시 술잔과 마주 하며 다음과 같은 한탄을 내뱉게 된다.
"돈만 있으면... 돈만 있었으면..."
그렇다. 돈만 많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술을 통해 관상도 바꿀 수도 있으며, 개인 트레이닝을 통해 몸짱으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하드웨어뿐만이 아니다. 어학연수나 개인과외를 통해 2~3개 국어를 습득함으로써 지적 소프트웨어도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수행하는 데에 드는 비용과 시간은 결코 녹녹지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용은 다소 들더라도 시간은 적게 들며 성과는 빠른 하드웨어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그중 쇼핑은 최고의 성과를 자랑한다. 노출이 큰 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벤츠나 에르메스와 같이 명품으로 분류되는 값비싼 물건을 소유할수록,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의 아이폰처럼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획기적인 물건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얻는 만족감은 훨씬 커진다. 이들 물건이 지니는 높은 희소성이 그 이유이다. 희소성이 높다는 것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가격은 비싸다는 것을 의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물건을 소유한 사람을 부자 혹은 경제적 능력자로 인식을 한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고가의 물건으로 치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했을 때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고 걸음걸이가 당당해지는 이유의 전부이다.
이 세상에 천 년 삼과 같은 진귀한 약재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약이 사람을 신선으로 만들어 주지도 못할뿐더러 만병을 치료할 수도 없다. 하물며 소비라는 행위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을 모두 떨쳐줄 리가 만무하다. 물론 소비를 통해 누군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외형을 부유하게 포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반복해야 하듯이, 소비를 통해 가난을 감추려는 일상이 반복될수록 우리가 염원하는 부자는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갈 뿐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소비를 하고 그것을 통해 부를 과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경제적인 불안과 열등감에서 비롯된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안요소가 존재하지 않는 부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소비를 하는 것일까?
사실 부자들은 그들 스스로 재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애써 그들이 알리려 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먼저 알아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소비를 통해 진정 얻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차별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중세 서양의 경우, 언어생활에 있어서 귀족들은 주로 라틴어를 일상에서 사용한 반면 서민들은 지금은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된 지방어를 사용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세계 언어학회에서 최고의 문자로 추앙받는 한글이지만,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수백 년 동안 여인이나 평민이 쓰는 미천한 글자라 하여 언문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계층 문화는 언어와 문자생활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학, 예술, 놀이는 물론이요, 심지어 기사도나 선비정신 같은 삶의 방식에 까지 다다른다. 귀족이나 양반 같은 특권계급이 그들만의 문화를 만든 이유는 단순했다. 문화의 차별을 통해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부각하였을 때, 피지배층 위에 군림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반이니. 귀족이니 하는 신분은 법의 테두리에서만 사라졌을 뿐,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부자(상류층)와 중산층 그리고 서민과 빈곤층이라는 새로운 형태로써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무거운 옷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옷을 꺼내 입듯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 그 시대에 걸맞은 질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계층 문화도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대중 위에 군림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써 계층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계층 문화는 소비로써 계급을 부여받고, 그 계급에 따라 차별을 받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M박스라는 영화관이 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영화관만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까. 영화관에서 'VIP회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무료 영화 관람관을 비롯해 신문과 잡지 1년 무료 구독권, 음료와 팝콘 무료 이용권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VIP 선정 기준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상 내년에도 똑같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관은 왜 나더러 VIP라고 칭하며, 남들과 다른 대우를 하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저희 업체에 많은 돈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혜택 유지를 원하시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돈을 써 주십시오.' 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아마 돈이 지배하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소비함으로써 계급을 부여받게 된다. 화장품을 사거나 옷을 살 때도, 통신 요금을 낼 때도, 심지어 동네의 마트를 이용할 때도 우리가 지출한 돈에 의해 계급을 부여받고, 그 계급에 의해서 크고 작은 차별이 생겨난다. 하물며 소비의 규모가 큰 대형 백화점의 VIP 또는 VVIP라는 이름의 고객은 어떨까?
자동차를 몰고 백화점에 간다고 생각을 해보자. 주차장으로 들어선 순간 빽빽하게 차들을 마주하며 주차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핸들을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VIP라는 계급을 획득한 소수는 다르다.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전용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굳이 사수 경계를 하며 비좁은 주차장 안을 헤맬 필요도 없다. 발렛파킹이라는 서비스가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차를 끝내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VIP 라운지라는 휴식 공간까지 마련해 준다. 마치 중세의 귀족을 접견하듯 말이다.
이외에도 우리가 은행에서 순번표를 뽑아 대기순서를 기다릴 때 부지들은 VIP룸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상속과 증여, 부동산과 절세 등 일반인들은 접하지 못할 그런 내용의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공항을 이용할 때도 호텔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차별에 혹자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처럼 '부르주아지의 횡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1억 원이 훌쩍 넘을 돈을 쓰고도 100만 원을 쓴 사람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또한 이와 같은 혜택을 부여받게 되었을 때, 이 모든 혜택을 마다할 이유는 무엇일까?
부자들은 소비한다. 때론 그들의 소비 행위를 일러 사람들은 '돈지랄'이라며 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끝없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과 별반 다를게 없다.
이처럼 돈은 삶을 편안하게 하는 수단이자 도구로 활용이 된다. 그러나 재물이 풍족하고 살림이 넉넉하다고만 하여 그 사람을 부자라 칭할 수 있을까?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서 그 물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자.
방금 읽으신 글은 두 번째 글입니다.
<글의 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