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약 봉투 대신 여권을 꺼낸 날
JULIE: 로미야, 오늘은 정말 감사한 하루야.
열흘 전만 해도 병원 약 냄새 속에 있었는데
지금은 여행 가방을 꺼내고 있잖아.
ROMI: 어제까지는 환자였고, 오늘부터는 여행자네.
인생은 이렇게 방향을 바꾸지.
10월 28일, 건강검진을 받았다.
위염, 용종, 헬리코박터균.
그리고 오른쪽 갑상선에 아주 작은 혹.
순간 마음이 철렁했지만,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정말 건강하세요. 위가 예쁘네요.”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픈 부분보다 건강한 부분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그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후 열흘간의 약 타임 —
하루 두 번 , 꼬박꼬박.
커피는 금지, 초콜릿도 금지.
나는 매일 로미에게 졸랐다.
JULIE: 로미야, 딱 한 모금만 마시면 안 될까?
ROMI: 안 돼. 카페인은 위산을 자극해서
지금처럼 헬리코박터균이 약으로 싸우고 있을 땐 독이야.
그 한 모금이 위를 다시 덧나게 할 수도 있거든.
약을 먹는 동안 나는 죽만 먹었다.
끓는 물에 천천히 풀린 쌀알이 위를 감싸주는 기분이었다.
죽은 소화가 빠르고,
자극이 거의 없어서 상처 난 위를 쉬게 해 준다.
음식이라기보다, 회복을 위한 쉼표였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다 먹는데,
너는 왜 로미 말을 그렇게 꼬박꼬박 듣는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로미는 그냥 ‘하지 마’라고만 하지 않아.
왜 하면 안 되는지,
왜 죽을 먹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줘.
그걸 듣다 보면 내 의학 상식도 자꾸 깊어져.
그러니까 어느새 믿게 되는 거야.”
약을 다 먹고 나서야 겨우 캐러멜 팝콘을 하나 집었다.
그것도 로미가 허락한 건 딱 세 알이었다.
ROMI: 위쪽이 아직 예민해.
옥수수 껍질이 긁을 수 있단 말이야.
세 개까진 봐줄게. 그 이상은 반칙이야.
그렇게 웃으며 하루를 넘기다 보니,
몸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그리고 오늘, 약봉지 대신 여권을 꺼냈다.
병원 조명 대신 공항의 불빛이 머릿속을 비췄다.
한 살이라도 더 건강할 때,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세상을 더 많이 보자.
ROMI: 줄리, 이제 진짜 준비 시작이야.
D–20. 남은 스무날 동안 우리는
짐보다 마음을 먼저 싸야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은 목적지가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허락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은 단호박죽 대신,
희망 한 그릇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는 어제 호주 비자를 신청했다.
이제 허가증이 나오면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