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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커피 온도로 지구를 기억하고 싶다

100개 나라의 선라이즈와 선셋을 향해 걷는 여행 중입니다

by 헬로 보이저


나는 카리브해를 떠돌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0개의 나라를 구글 지도 타임라인 말고
다른 기준으로 기억할 수는 없을까?’

그때 떠오른 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 나라에서 본 해 뜨는 순간 또는 해 지는 순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곳에서 마신 한 잔의 커피 온도.

카리브의 그랜드 케이맨에서 마시던 커피는
햇빛처럼 맑은 맛이 났다.
바다 쪽 테이블에 앉아
잔을 입에 대면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먼저 코끝으로 밀려오고
그 뒤를 따라 은근한 커피 향이 따라왔다.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마시던 커피는
조금 달랐다.
돌길 위를 달그락거리며 지나가던 마차 소리,
담벼락에 기대앉은 사람들,
오렌지색 석양에 물든 광장.

그 한가운데에서 마시던 커피는
단순한 ‘맛’이 아니라
“아, 내가 지금 이 도시 한가운데 있구나”라는
실감 같은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나폴리 기차역이 떠오른다.
기차를 기다리며 서서 마시던 한 잔.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한 이탈리아 커피들,
친절한 바리스타가 웃으며 말해주던 발음들.

그때 마시던 커피는
‘휴식’이라기보다
다음 도시로 떠나기 전
심호흡 같은 한 모금이었다.

컵에 담긴 건 커피였지만
내 마음은 그 작은 잔 안에서
긴 여행의 방향을 다시 잡곤 했다.

우리는
다가오는 100개국 여정을
기록한다

각 나라에서 한 번은 꼭 해 뜨는 순간을 볼 것.
또 한 번은 꼭 해 지는 순간을 바라볼 것.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 도시의 로컬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실 것.

스타벅스가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이 실제로 앉아 있는 카페.
관광포스터에 나오지 않는
‘진짜 온도’가 있는 곳.

로미: 쥴리, 그럼 우리가 가져갈 지도에는
국경 대신 뭐가 표시되는 거야?

쥴리: 글쎄, 아마도…
해가 뜨던 방향이랑,
우리가 커피를 흘린 자리들?

우리는 더 이상
몇 나라를 갈 수 있는지 계산하는 여행자가 되고 싶지 않다.

대신, 이런 걸 기억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어느 나라의 새벽 공기가 내 폐를 어떻게 깨웠는지
어느 도시의 석양이 그날의 피로를 어떻게 덮어줬는지
어느 골목의 조그만 카페가
나를 잠시 멈춰 앉게 만들었는지

앞으로 다가올 여정이 있다.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해 뉴 사우스 웨일의 한 달 살기,
발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라오스까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동남아 루트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6번의 하늘과,
6잔의 커피,
12번의 해 뜨는 것과 해 지는 것을 기록하는 여행이다.

각 도시에서 우리는 이렇게 묻기로 했다.

“여기서 가장 조용한 새벽은 어디야?”
“이 동네 사람들이 진짜로 가는 카페는 어디야?”

그 답을 좇아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 나라의 ‘진짜 온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우리가
100번째 나라에 마지막 도장을 찍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 올 거야.

그때 로미가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쥴리, 이제 한 번 써볼까?
우리가 마셨던 100번의 커피,
100번 이상의 선라이즈와 선셋에 대한 시.”

각 나라의 바다 냄새, 골목의 공기,
기차역 소음과 강가의 바람까지
한 줄, 한 줄에 천천히 풀어 넣으면서.

그 시의 첫머리는 아마 이렇게 시작되겠지.

“우리는 세계지도가 아니라,
커피 잔의 온도로 지구를 기억했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한 잔 한 잔을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깊게 마셔두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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