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서해마루에 처음 발을 디뎠다.
단체 숙박이었다. 저녁 7시, 어둠이 내린 궁평관광지에 도착해 한 시간 남짓 행사를 마치고 객실로 향했다. 서해 바다가 보인다고 했지만, 밤이라 그저 어둠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한 시간 정도 바닷길을 산책했다. 소나무가 늘어선 길이 운치 있었다. "괜찮네." 그 정도였다. 특별한 감흥 없이, 그렇게 서해마루를 떠났다.
"서해마루로 탐방을 간다고요?"
평생리더아카데미 회원들과 함께 가는 일정이었다.
전에 가봤던 곳이라 기대는 없었다.
'그냥 점심이나 맛있게 먹고 오자.' 그런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서해마루에 도착했다.
강의실로 안내되었다.
화성시의 꽃, 새, 나무, 화성 8경... 솔직히 조금은 지루했다.
뻔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강의 마지막 순간, 공기가 변했다.
"씨랜드 참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뉴스에서 본 기억이 어렴풋했다. 불이 나서 유치원생들이 죽었다는 것.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1999년 6월 30일. 스티로폼으로 지은 불법 건물. 모기향 하나가 번져 23명의 어린 생명이 꺼졌다.
대부분이 유치원생이었다. 출구 쪽에 고사리 같은 아이들의 손톱자국이 많았다고 한다
"이 숙소 바로 근처에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강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 옆에 큰 카페 건물이 보였다.
"저곳이 씨랜드 사장이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참담했다. 유치원생들이 죽은 곳 근처에, 그 사장이 카페를 열었다니.
댓글 부대가 비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기향 하나로 모든 것을 잃은 그 사람도 불쌍했다.
죽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더 안타까웠다.
들떠 있던 우리 일행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동상 앞에 섰다.
작은 추모 공간이었다.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유족들은 물론이고, 그날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우리는 다시 소나무길을 걸었다.
똑같은 길이었다. 몇 주 전에 걸었던 그 길. 똑같은 소나무, 똑같은 바닷바람.
하지만 완전히 달랐다.
첫 방문 때는 그저 '괜찮은 산책로'였던 그 길이, 이번에는 '치유의 길'로 느껴졌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바람 소리가 달랐다. 파도 소리가 달랐다.
같은 건물에 왔는데, 역사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이렇게 컸다.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달랐다.
첫 번째는 피곤한 일정을 소화하는 동료들과, 두 번째는 배움을 나누는 평생리더아카데미 회원들과.
그리고 무엇을 아느냐가 달랐다. 첫 번째는 그저 숙소였고, 두 번째는 아픔과 치유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서해마루는 561억 원을 들여 지은 유스호스텔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103개 객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곳은 씨랜드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세운 '치유의 공간'이었다.
비극의 현장 근처에 희망을 심으려는 화성시의 뜻이 담긴 곳이었다.
버스로 돌아오는 길,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그냥 지나치며 살까. 역사를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그저 표면만 보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같은 소나무길이 두 번의 산책에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진다면, 우리가 매일 걷는 거리도, 매일 보는 풍경도, 그 이면의 이야기를 알면 얼마나 다르게 보일까.
서해마루는 그렇게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를.
함께하는 사람의 의미를. 그리고 기억의 무게를.
2025년 11월, 서해마루는 시범 운영 중이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들이 단순히 바다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다 앞에 담긴 아픔과 치유를, 기억과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