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 일본에 오게 될 줄은, 심지어 살게 될 줄은. 그것도 어느덧 26년째, 어쩌면 뼈를 묻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한국으로 돌아갈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를 핑계로 일본에 남았고, 이제는 여기가 인생의 종착역이 될 것 같다. 적어도 한 치 앞 정도는 내다보고 살려고 노력했는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썼는데, 이때의 결정을 나는 지금 뼈저리게 아파하고 있다.
2008년쯤, 딸아이가 5학년 때였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점점 연로해지시고, 두 분의 병치레가 시작되었다. 딸아이가 한국의 학업을 따라가려면 적어도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더 늦으면 소문으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입시 지옥에서 살아남기는커녕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두려웠다. 엄마 껌딱지였던 일곱 살 터울의 아들아이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직 여유가 있다 싶어서인지 걱정 밖이었다.
남편의 직장 관계로 일본에서 살게 된 터라 남편은 일본에서 기러기 아빠로, 나와 아이들은 한국에서 살며 이산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주변의 모두가 반대했다. 먼저 딸아이의 의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물었더니, 한국에 가서 공부 못하는 애가 되는 게 싫단다. 생후 4개월 때 일본에 와서 10개월 무렵부터 약 2년간 일본 보육원을 다녔고, 잠시 귀국했던 1년간은 한국의 유치원 3세아 반에 입학해 잘 적응했다. 그 덕분에 한국말은 곧잘 했고 간단한 읽고 쓰기도 가능했다. 일본에 다시 왔을 때는 일본어를 거의 잊은 상태였음에도 잘 적응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1, 2년 정도 고생하면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해도 웬일인지 딸아이의 의사는 단호했다.
부모님도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반대하셨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한국 교육의 문제점, 입시 지옥 등에 대해 설파하며 절대 오지 말라는 말까지 했다. 나보다 엄격한 교육관을 갖고 있던 남편은 나의 훈육 방식이 미덥지 않았던지 “잘할 수 있겠나?”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럼, 나는? 그즈음 평소보다는 조금 강하게 향수병이 왔다. 그냥 무작정 돌아가고 싶었다. 먹고 싶은 음식들이 그리워 괴로웠다. 그런 한편, 곧 사춘기에 접어들 아이들을 과연 나 혼자 잘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나를 걱정해서, 미안해서 한 말이란 걸 알지만, 남편의 우려 섞인 말은 내 불안을 가중시켰다.
거기다 일본 친구들도 말렸다. 올해로 20년째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들인데 아이들을 매개로 만났다. 시에서 주최한 ‘8개월 영아 교실’에서 자리가 가까웠던 사람들을 어떤 친구가 자기 집에 초대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기와 엄마 10쌍이 모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5쌍이 남았다. 마음이 맞은 건지 결이 맞은 건지 지금까지 친하게 지낸다.
당시 고민을 털어놓자, 유행하던 ‘끌어당김의 법칙’을 들먹였다.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 이곳이 고향인 사람 2명, 타향 출신 2명,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 출신 1명이 만나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는 건, 이곳의 무언가가 우리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끌어당겼을 수 있다고도 했다. 내가 한국에 가면 슬플 것 같다니 고마웠다.
누가 가지 말란다고, 혹은 오지 말란다고 결정될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뿐 아직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 무엇보다 나와 아이들이 일본에 잘 적응해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는 점이 ‘결정 타이밍‘을 놓치는데 크게 작용했다. 우리 모두에게 아직은 ‘절실함’이 그닷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수도 있었던 이 시기를 어영부영 흘려보내고 말았다. 17년 후 이때 놓친 기회를 아프게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