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초, 일본행은 갑자기 결정되었다.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딴 남편은 미국과 중국 중 어디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2월 경 어느 한 일본 교수와의 만남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일본 학자 그룹과의 교류회에서 그 교수의 강연을 들은 남편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서류 절차를 끝내더니, 석 달간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8월에 딸아이의 백일잔치를 끝내자마자 일본의 교토로 출국했다.
그해 1월 말부터, 임신 6개월이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남편의 시간이 저 혼자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나는 자연스레 그의 궤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일본에 와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 교수의 명성은 대단했다. ‘공해’라는 개념을 처음 세상에 내놓으며 환경 문제 분야에서 매우 명망 높은 분이었다. 남편의 인생에서 이 분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이 운명은 1년짜리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1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언어 좀 배우고, 뭔가 알듯 말듯한 어정쩡한 상태였으므로 여러모로 아쉬웠다. 그러던 차에 외국인 연구자를 지원하는 일본 학술 진흥 재단의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고, 1년 연구 계획이 통과되어 체류가 연장되었다. 2년을 지내고서야 생활에 익숙해져서 지낼만했고, 남편은 이 프로그램을 1년 더 연장해서 3년을 교토에서 보내게 되었다.
남편의 운명을 움직이는 톱니바퀴에 맞물려 나와 딸아이의 톱니바퀴도 함께 돌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때도 선택할 수 있었다. 한국에 남아서 친정 가족들 도움을 받으며 편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었고, 재취업해서 경력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내 인생을 중심에 두고 판단했더라면 우리의 톱니바퀴는 조금 느슨하게 맞물려 조금은 다른 형태로 돌 수 있지 않았을까?
인생은 결코 정답을 알려주지 않으며, 선택의 결과만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주체적인 삶을 살겠노라 했던 다짐들은 한낱 허영에 지나지 않았고, 후회 없이 살겠노라며 되도록 깊이 고민하고 판단해 결정해 왔다는 믿음도, 이제와 보면 허점 투성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시작된 일본 생활은 좌충우돌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한 달 먼저 일본으로 떠났다. 집도 구하고 소아과 병원 등 생활 인프라를 챙겨놓기 위해서였다.
첫 좌충우돌은 4개월 된 딸아이와 다섯 보따리의 짐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자마자 벌어졌다. 자리에 앉자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좁은 공간, 낯선 사람들, 시끄러운 소음 때문이었을까. 배고플 시간이 아닌데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분유를 미리 준비해 둘 걸…’하는 후회도 사치였다. 젖병을 꺼내 분유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흔들어 섞었다. 아기를 앞에 안은 채로 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시간은 그 순간 멈춘 듯했고, 기내의 모든 사람이 내 동작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마치고 기내가 고요해지자, 상황은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전보다 커져 기내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 미안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식은땀이 흐르고, 뺨은 불타듯 달아올랐다. 다행히 분유를 먹자 아기는 곧 안정을 찾고 도착할 때까지 곤히 잠들어주었다.
“원래는 착한 아기인데, 엄마가 준비가 서툴러서 미안해.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새내기 엄마구나.”
그 소동 때문이었을까. 9월의 간사이 국제공항은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두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도, 아주 먼 곳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찾는 곳에 가니 또다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챙겨야 할 짐이 무려 다섯 개나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은 아기를 위한 짐으로, 배편으로 부친 짐이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한 것들이었다.
출발할 때는 가족이 도와주어 힘든 줄 몰랐는데, 여기엔 아무도 없었다. 아기를 앞에 안고 배낭까지 멘 내 모습으로는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보니, 옆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잔뜩 피해를 입었을 한국인 남자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강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뻔뻔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짐을 부탁했다.
짐 다섯 개가 한 번에 나올 리 없었다. 여러 번 사과하는 나에게 그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표정은 무덤덤했다. 역시 너무 폐를 끼친 게 틀림없다. 그는 짐을 가지런히 카트에 올려주고는 기다리던 일행에 서둘러 합류했다. 내 감사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그의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항 직원에게 부탁했어도 되는 일이었는데….
드디어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저쪽에서 남편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기쁨보다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고생했어! 힘들었지?”
“응, 정말― 너무 힘들었어! 있잖아…”
남편에게 내 고생담을 속 시원히 다 풀어놓으려 했는데, 진정되지 않은 탓인지 말이 뒤죽박죽이 되어 공감받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여러 이야기가 뒤섞여 결국은 “정말 힘들었어!”라는 한마디로 종결됐다. 대부분의 고생담의 운명은 대개 이렇게 정리되기 마련이다.
“고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