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박사 후 과정 연구자의 체재비는 3인 가족이 살기에는 넉넉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출국한 후 1년 치 지원비가 입금되는 관계로 이를 부모님께서 송금해 주셨다. 어쨌든 큰돈이라는 생각에 일단 6개월 치만 먼저 받았는데, 그 사이에 IMF 사태가 터져서 원화 가치가 반 토막이 났다. 그냥 처음에 전액 송금받을 걸… 돈이 관련된 후회는 왜 이리 더 쓰릴까?
판단 미스는 순식간이고, 그 여파는 영원과도 같다
1년 예정의 일본살이였으므로, 살림은 최대한 적게, 필요한 것들만 갖췄다. 냉장고, 세탁기, 전기밥통, 전자레인지를 새것으로 샀다. 보통 유학생들이 쓰던 걸 물려받는 걸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긴 했지만, 당시 마땅하게 나와 있는 물건도 없었고 그땐 몰랐지만, 총 3년 간 써야 했던 걸 생각하면 아깝다고 할 수만도 없을 듯하다. 21인치의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히터, 에어컨은 아주 낡았지만 집에 설치되어 있었고, 집주인이 책장과 식탁 세트도 빌려주셨다. 게다가 옆 집 분이 앉은뱅이 사각 탁자도 주셔서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남편이 구한 일본 집은 단층의 단독주택이었다. 정면은 좁고 안쪽으로 긴 형태였다. 중개료와 보증금도 없었고, 낡은 다다미 위에 카펫도 깔아준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집 바로 옆이 묘지였다.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데 집 한 채 정도 크기의 공터에 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일본 묘지는 가족묘로 큰 묘비와 묘비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묘지는 뒤에 있는 절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귀신이 나오면 어쩌지? 집 터의 기가 세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등 겁이 많이 났지만, 오히려 아기 우는 소리 등으로 이웃집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덕분에 해도 잘 드니 장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기도 했다. 각 묘지마다 꽃들이 꽂혀 있어서 꽃밭 같기도 했다. 묘지가 아니라 집이 들어서 있었다면 해가 들 곳이 정말 없었다. 일자로 긴 집이라 양쪽이 다 벽이었다면, 집 꽁무니의 전면 새시 문과 현관문만이 유일하게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나마 새시 문 뒤에도 작은 방이 있었고 빨래를 너는 테라스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있어서 그늘이 가득했다. 이 묘지는 이 집을 살리는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이 묘지 옆집에서 3년을 살았지만 걱정했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집은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 집의 화장실이 하필 묘지 쪽에 있었다. 화장실의 작은 창문 너머로 묘지가 내다보였다. 모두 잠든 깜깜한 새벽,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화장실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창문에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그림자라도 어른거리면 작은 소리로 기도문을 수없이 외웠다.
교토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이웃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일본 생활 안내서에 나온 대로 양 옆집과 뒷집. 그동안 ‘부인은 언제 오느냐?’는 이웃들의 인사에 시달렸던 남편은 겨우 ‘히라가나(일본 글자)’를 뗀 내게 한글로 인사말을 써주었다. 마법사의 주문과도 같은 말을 떠듬떠듬 말하며 나의 ‘이웃집과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남편도 가까스로 일본어 문법 정도 마치고 간단한 일상 회화 몇 개 외운 수준의 일본어 실력이었으니, 스스로도 맘이 바빴을 것이다. 거기다 어린 딸과 의사소통 불가능한 아내까지 건사해야 했으니 좀 힘들었을까. 나는 나대로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답답했고, 처음 하는 육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태로 보낸 1년은 눈치코치 없이 빨리 지나갔고, 또 다른 기회가 슬쩍 끼어들었다. ‘일본학술진흥회’에서 외국인 연구자를 위해 연구비와 체재비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다. 집세를 별도로 지원해 주기 때문에 총 지원액수가 한국연구재단의 2배가 넘었다. 우리는 “무조건 고!”를 외쳤다. 총 2년의 연구 기회가 주어지는데 우선 1년 연구계획을 제출했고, 운 좋게 통과됐다. 1년 후 이 운은 또 한 번 우리 편이 되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남편이 한눈에 반한 그 교수님의 명망이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교토에서의 3년, 너무 어설퍼서 힘들었고, 정말 열심히 살아서 애틋하고, 이웃들 덕분에 정겨운 곳. 그곳에서의 추억 속으로 타임 슬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