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서 도망친 곳엔, 천국은 없었다

엄마를 붙잡고 고래처럼 울었다

by 이지아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의 셔츠에서는

낯선 향수냄새가 났다.


그가 어디에서 밤을 지새웠는지 알고 싶었다.

정말이지, 단 한 번만이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묻는 순간, 내 가정은 무너질지도 몰라.'


나는 너무 두려워서,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두 번째 방, 남편의 방


도박은... 날 위로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패를 쥐고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방.
지기 전까진, 내가 나인 방.

그 방에서 나올 때면 늘 생각했다.


'이제 그만하자.'


하지만 이긴 날은 기분이 좋았고,
진 날은 속이 허해서,
결국은 또 돌아가게 된다.


집은 여전히 넉넉했다.
아이들은 잘 자랐고,
냉장고엔 빈칸이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점점 비어갔다.

남편은 더 말이 없어졌고,
밤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도 늦어?"

"응. 거래처 회식."


그렇게 말하고 나간 그의 셔츠에서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묻고 싶었다.
정말이지, 한 번만이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묻는 순간, 내 가정은 무너질지도 몰라.'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수 돌던 어느 날,

과일가게 아줌마가 툭 던지듯 내게 말했다.


"아줌니 남편, 여기서 어떤 여자랑 나오던디?"

"바로 요 앞 빌라에서 나오는걸 순이네가 봤다 카데...?"


뭐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심장이 무너진 건지, 다리가 풀린 건지.
집으로 오는 내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그날 밤, 아이들 밥을 먹이고
냉장고 문을 닫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도 이제 한번, 사람처럼 살아볼까."


# 머리채를 잡았고, 나는 울지 않았다.


그 집은 아담했다.
해운대 바닷바람이 닿는 골목 끝,
주황색 불빛이 흐릿하게 번지는 3층짜리 빌라.

문이 열렸다.


낯선 여자의 모습.
화장을 곱게 한 어려 보이는 예쁜 얼굴.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어머? 누구세요?"


'눈치도 없는 년'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걸어 들어가 거실 한가운데 섰다.


탁자 위엔 컵 두 개,
한쪽 벽엔 그의 와이셔츠.


"당신 뭐야!"


그 말이 내 귓전을 울리자마자,
나는 그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어딘가서 본 적 있는 장면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금 누굴 때리는 건지도 잘 몰랐다.

휘감아쥔 머리채가 손가락 사이에서 울었다.


여자의 비명은 울리지 않았다.
내입은 욕을 하고, 비명을 질렀댔지만,
귀에 닿는 건 내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뒤늦게 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멈칫했다.


“어... 주영이 엄마...!”


그 목소리에, 나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는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그날은 들을 수 없었다.


#고래처럼 울었다, 엄마에게


남편을 그 여자 집에 두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무슨 정신으로 걸어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덜컥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나만 등신이었네. 바.보.등.신"


남편이, 나를 속이다니...


현관문을 열자,
아이들이 자고 있었다.
불 꺼진 부엌,
불 꺼진 마음.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1시 47분.


" 엄마, 왜 나한테만 그랬어? 왜! "


나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나는 혼자 쏟아내듯 소리 질렀다.


"왜 나만 차별했어?"
"왜 나만, 학교 안 보내줬어? "

"왜 나만, 도라지 까는 일 시키고, 눈칫밥 줬어? 어! 왜!"


한참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정적이 흘렀을까?

나는 참지 못하고 쏟아내 버렸다.


"주영이 아빠 바람났어. 이렇게 된 거, 다 엄마 때문이야. 다 엄마 때문이야!!"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는 멀었지만,

연결된 전화기 속 엄마의 숨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불의불식 간에

화살처럼 쏟아내는 내 원망을

그대로 듣기만 하던 엄마는 놀란 기색도 없었다.


" 그만해라, 명순아."


그저 메마른 엄마의 한마디가
미친년처럼 악다구니 쓰는 나를 허탈하게 했다.


"네가 똑똑했으면, 학교 갔겠지..."


엄마의 그 말에 어디에도 나에 대한 걱정도 미안함도 없었다.

남은 건, 그저 한줄기 냉소뿐이었다.


그날 나는
고래처럼 꺼억꺼억 울었다.
쉴 틈 없는 울음,
숨 쉬기도 어려운 그 울음.

전화를 끊고 나니,
방 안은 조용했다.
마치 내가 없어진 것처럼.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다 쏟아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만, 엄마의 미안해하지 않는 냉소가 더 커졌다고 해야 할까?


그럴수록 나는 더 망가져갔다.


그렇게 엄마에게서도 위로를 찾지 못한 채,

나의 삶은 더욱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남편의 바람은 처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여자가 처음이 아니었던 거였다.


나에게 들킨 게 처음이었을 뿐.

한 번이 두 번, 세 번... 나중엔 세지도 않았다.

무릎 꿇던 사람은 이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여자사고가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던 어느 날


"그만 좀 하자."


그 한마디만 내게 남았다.


이제 그는 나를 보며 숨기지 않았다.
새로 산 와이셔츠엔 립스틱 자국도 그대로 남겨뒀다.


"시끄럽다" 그 한마디가 뱉어내진 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했다.


네가 뭘 알겠냐고,
이미 마음은 떠났는데,
몸만 붙잡고 뭐 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경멸하는 듯한 그의 시선은 내 숨을 천천히 베어냈다.


그날 밤, 아이들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매가 장난치며 깔깔대는 소리.
나는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문을 열지 않고 돌아섰다.


'괜히 열었다가... 내가 또 울면 어떡하지.'
'애들한테까지 들킬까 봐… 겁이 났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 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저녁도 대충 차리고, 말도 줄었다.


애들이 밥 먹자고 불러도,

"먹어라" 한마디만 하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에게도 조금씩 등을 돌렸다


그땐 몰랐다.
그게 시작이었다는 걸.


나는 끝내, 그를 놓지 못했다.


아이들 때문이라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날 떠나버릴까 봐,
버림받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려워서였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고래처럼 울었고, 그 울음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도라지꽃 #명순이 #외도 #외로움



『도라지꽃』 시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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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받기 위해 살아온 명순은,

사랑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남편의 떠나버린 사랑은 그녀를 점점 더 말라버리게 하는데,,,,


고래처럼 울부짖었지만,

엄마를 피해 도망친 곳엔 천국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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