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긴날' 이라고 믿고 싶었던 밤
#사고는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사고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나를 막으면 하나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너지기로 작정한 날엔, 삶도 그렇게 마음을 알아챘는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렇게 예고 없이 덮쳐왔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웃었다.
몇 주 만에 터진 웃음이었고,
그 웃음이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추락의 시작이었다.
그 시작은 곗돈이었다.
내 손으로 판 돈, 내가 믿고 돌린 사람들이었다.
일수도, 처음엔 잘 됐다.
과일가게 이모, 정육점 언니.
내가 돌리면 다들 잘 냈다.
시장사람들은 언제나 웃으면서 날 반겨줬고,
고맙다며 일수장부를 찍었다.
그런데 그 몇 달이 전부였다.
대목장사를 망쳤고,
애가 아프다 하고,
남편이 다쳤다 했다.
" 언니, 오늘만 좀 미뤄줘요."
" 내가 진짜 갚을게요, 진짜로."
이제는 찾아가도 문이 닫혀 있는 일이 다반사였고,
전에는 웃으며 돈 내던 사람들이,
" 오늘은 좀..." 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금 날짜가 다가올수록 뱃속이 꼬이듯 아팠다.
돈이야 그렇다 쳐도, ‘나를 피한다’는 사실이 더 서러웠다.
" 다음 주에 줄게요, 이번만 봐줘요."
이유는 많은데, 돈은 없었다.
그 말들이 줄줄이 장부에 적혔고,
나는 이름을 지우고, 금액만 남기는 사람이 됐다.
빨간 줄이 한 줄씩 늘어갈 때마다
내 안의 뭔가도 하나씩 쪼그라들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돈은 있는 사람한테 빌려줘야 된다는 걸...
어설픈 자기기만이 나를 갉아먹고있었다.
일수는 남편이 추천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수금이 안 될수록
남편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가 기대했던 만큼
내가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게 자꾸 티가 났다.
내가 잘하고있는지 한번씩 확인하는 듯.
" 그 돈은 어떻게 됐어? "
그 한마디에 등줄기부터 식은땀이 났다.
" 조금 밀렸어. 이번 주엔 다 받을 거야."
그렇게 대답했지만,
다 받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받아야 하는 돈이 쌓여가고,
못 받는 나도 쌓여갔다.
점점,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곗돈은 날리고,
일수도 제대로 못 걷는 내가.
남편이 쳐다보는 눈빛에도
언젠가 실망이 묻어날까 봐,
더 작아지고, 더 조용해지고, 더 없어지게 되었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가끔 기타를 치던 내 손가락을 떠올렸다.
밤무대 조명 아래,
박수보다 먼저 튀어나오던 노랫소리.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내 목소리가, 내 손이,
내 존재 자체가 ‘돈’이 되던 시절.
그런데 지금은...
식은밥 한 공기와 아이들 등짝만 바라보며
하루를 말없이 넘긴다.
기타도, 노래도 다 묻어두고
그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만 살아가는 중이다.
" 명순아, 넌 목소리가 재산이야 "
그렇게 말해주던 클럽 사장님의 말이
이따금 귀에서 맴돈다.
하지만 이제,
내 목소리는 누구도 듣지 않는다.
가끔은 그런 상상도 한다.
아무도 모르는 지방 도시 어딘가에서
다시 무대에 서는 거다.
다시,
나 혼자의 이름으로.
그날도, 일수 돈을 받으러 단골 미용실에 들른 길이었다.
" 잠깐만 여기 앉아 있어~"
미용실 뒷방 문이 열리자,
옆집 경자이모가 화투장을 섞고 있었다.
안에서는 라면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
머리카락 타는 냄새와 화장품 냄새, 그리고 뭔가 웃음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우리끼리 심심해서 그냥...손님 없을때... 재미로 하는거야."
미용실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처음엔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런데 한 바퀴가 도니,
" 한 번 해봐. 재밌어~ 오늘 운 괜찮은 날이야."
경자이모가 웃으며 내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아니에요, 전 구경만..."
그러나 한 판, 두 판 돌아가는 걸 보며 나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다.
웃고 있는 사람들. 돈을 잃고도 즐거운 얼굴.
그 안에, 내가 앉을 자리가 생긴 것 같았다.
"한 판만... 해볼까요?"
그렇게 앉았다. 손끝에 화투패가 스쳤고, 작은 내기지만 돈이 오갔다.
그렇게... 처음 패를 집었다.
화투를 섞는 손끝에서,
나는 오래전 무대 위 조명처럼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을 느꼈다.
누구도 ‘명순이~’ 하고 불러주지 않는 요즘,
그 방 안에서만은 내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빛처럼 돌아가는 패,
그날 이상하게 운이 좋았다.
만원이 오만 원이 되고,
그걸 다시 십만 원으로 바꾸며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오늘은 이긴 날."
지폐를 접어 가방 안에 넣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나는 이미 그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찾으러 간 거였지만,
뭘 잃게 될지는 아직 몰랐다.
그날, 나는 한 시간 동안 웃었고
그 웃음은 몇 주 만에 터진 웃음이었다.
가위로 머리를 자르던 손,
칼로 고기를 썰던 손,
계산기 두드리던 손,
그 손들이 지금은 화투장을 쥐고 있다.
하필 그 방,
하필 그날.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지’ 할 일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조용히 미끄러진 첫 발자국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이 시원했다.
뒷골목 백반집 앞을 지나는데
유리문 안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치찌개 냄새, 튀김 기름, 삶은 국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속이 허해졌다.
그 방에선 김이 모락모락 났고,
이 거리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났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거기선 따뜻함이었고,
여기선 허기였다.
그날 밤, 겨우 웃음을 되찾고 돌아온 나를 본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침묵이 더 서러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착각.
그게 착각인 줄은,
금방 알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것조차 내 것이었다.
돈을 땄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누군가와 같은 자리에 앉아 웃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고,
그게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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