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손목 위, 은빛의 무게

시든 튤립 옆의 붉은 벨벳 파우치

클리닉에는 여전히 바닐라 향이 감돈다. 달콤하지만은 않은, 차갑고 건조한 도시의 외벽을 뚫고 흘러들어온.



그것은 공간의 소독된 공기를 뚫고 들어온 누군가의 잔향이었다.

3천 마일 밖의 도시에서 건너온 시큼한 사탕 한 봉지, 그리고 현재의 시제로 생일 축하를 건네고 뉴욕으로 날아갔던 어느 미국인 환자의 조심스러운 온기. 그는 나를 살찌우겠다며 약속한 1,000Kcal의 크럼블 쿠키를 가져오지 않았다. 사탕 봉지만 남았다.

그 바닐라 향은 서두르지 않는 속도로 흩어지며, 일말의 확인을 요구하지 않는 조용한 축하로 남았다.


단주 51일째인 그 날, 이 향기는 나를 과거의 일기장이 묻힌 더 차가운 근원으로 데려다주는 이정표가 된다.

여정은 근원을 향한 무심하도록 지루한 행위였다. 차 창밖의 풍경은 도시의 날카로운 수직선에서 온돌의 낮고 회색빛인 수평선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여 있다.


평생을 아픈 사람(sick role)이라는 견고한 가면 속에서 보낸 한 여자가 그곳에 있다. 그것은 그녀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등록하기 위해 다듬은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소설 속에 나올 법한 다정한 문법 대신, 자신 또한 하나의 희생자였던ㅡ 결코 도착하지 않을 애정을 갈망하며 형식적인 예의만을 유지한 그녀.



근처 무인 꽃집에서 싱싱하게 꽉 조인 노란 프리지아와 국화 다발을 보았을 때 나는 주춤했다.


나는 그것을 고를 수 없었다. 대신 보랏빛 프리지아와 연분홍 튤립이 섞인, 약간 시든 다발을 선택했다.

그것들은 붉은 벨벳 파우치 속에 담긴 카르티에 시계의 은빛에 나란히 응답할 것 같았다.


다리가 약간 삭아가는 나무 식탁 앞에서, 어머니는 플라스틱 반찬통을 내민다. 그것은 그녀가 구사하는 가장 공식적인 형태의 사랑이자, 더 이상 나의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영양가이며, 응고된 애정이다.

보답으로 나는 그녀의 손목에 카르티에 발롱 블루의 은빛을 채웠다.


예상치 못한 무게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건넨 나의 시계.



시계는 온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핍이라는 동일한 지표를 공유하는 두 인생의 지속(duration)을 기록할 뿐이다.

금속이 살결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의 한 순간이 겹쳐진다. 그녀의 환자 역할과 딸인 나의 냉정한 글쓰기는 사실 같은 뿌리를 가진다. 피난처 없는 세상에서 각자의 경계를 지키기 위해 뒤집어쓴 가면인 것이다.


"돈 아깝게 이런 건 왜 가지고 왔느냐?"

그녀는 타박하고 거리를 두는 연기를 함으로써, 감정에 직접 손을 대지 않는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말없이 빛나는 은색은 말하고 있었다.

시계의 배터리와 육체의 용량이 함께 한계를 향해 가고 있음을.



어머니는 단단히 테이프가 감긴 내 손을 보았다. 그녀는 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한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돌봄을 받았다고 느끼는 유일한 기억은 어린 시절 설사를 했을 때 어머니가 고무 호스로 씻겨주던 순간이었다.

내 엄지손가락은 세 바늘 봉합되어 있다. 이제 30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그녀가 나를 씻긴다.


나는 망설인다. 노란 국화 앞에서 느꼈던 그 두려움이다. 이 샤워가 이루어진다면, 몸들이 맞닿는 이 마지막 친밀함이 어떤 종말을 예고할까 봐 주저했다. 하지만 물줄기는 쏟아진다.


작은 욕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 아래에서 그녀의 손이 내 튀어나온 척추를 따라 위아래로 움직인다.


"몸이 왜 이렇게 뼈만 남았느냐? 보기가 흉하다." 그것은 비난으로 위장한 애정이며, 불평으로 전달되는 걱정이다.

뼈와 힘줄로만 이루어진 나의 육체가 역시 역시 앙상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손길 아래 노출된다. 서로의 부재를 짊어진 두 연약한 육체가 피부라는 표면에서 조우한다.


여기서 미시마 유키오가 말한 가면은 물줄기 아래 잠시 투명해진다. 평소 우리는 서로에게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기 위해 정교한 가면을 연기해 왔지만, 이 욕실의 수증기 속에서 그 가면은 씻겨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가면이 얼굴과 구별할 수 없게 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진실을 마주한다. 그것은 폭로가 아니라, 서로의 방어선을 인정하는 정교한 화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애써 내가 끓인 뭇국을 먹는다. 기름기 없는 김이 서린 국그릇 위로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공기를 가른다. 스푼은 그릇 바닥을 긁으며 낮게 달그락거린다. 시계는 정확한 리듬으로 초침을 옮긴다.

바닐라 향과 은빛의 서늘함이 식탁 위의 증기와 뒤섞여 한 줄기의 아지랑이로 모여든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향수가 아니라, 역할을 연기하기를 멈춘 두 생존자가 공유하는 파장일 것이다.

단주 51일째, 과거의 재깍거림은 여전하다. 은빛 시계나 물줄기로 부채가 탕감되지는 않는다. 다만 언어가 감상이라는 이름 아래 박제되기 전에, 행위를 통해 서로를 승인할 뿐이다. 이것이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건네지는 진실함의 무게이다. 두 몸이 시간이라는 자원의 한계를 이해할 때, 촉각은 가장 진실한 화폐로 기능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거짓 없는 언어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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