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올해 초 '나를 보내지마'를 읽으며 경험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조금 옛스러운 문체와 조곤조곤한 이야기 전개, 그 안에서 느껴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참 좋았다.
그래서 선택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가장 최근작인 단편 모음집, '녹턴'.
녹턴, 야상곡(夜想曲)은 주로 밤에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밤의 성질을 띄는 악곡의 장르를 의미한다.(위키백과) 저녁이나 밤에 어울리는 몽환적인 음악이 바로 녹턴인 셈.
이 책을 읽는 동안 호주로 여행을 떠났다. 긴 비행시간 동안, 그리고 여행 짬짬이 읽다보니 어느새 완독.(p250 정도 분량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더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여행과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된다. 음악과 여행, 그리고 소소한 인간사, 여행지 독서목록을 계획 중이라면 강추!
부제에서처럼 책은 5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 : 다음은 개인적인 내용 요약)
▶ 크루너 : 기타리스트인 '나'가 어머니가 사랑했던 왕년의 인기스타 토니 가드너(크루너(crooner) - 낮은 목소리로 감상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대중가수.)를 우연히 만나고, 그와 함께 부인을 위한 세레나데를 함께 합주하면서 겪게되는, 인간의 어긋난 욕망에 대한 씁쓸한 여운이 남는 이야기.
▶ 비가 오나 해가 뜨나 : 외국을 떠돌며 영어를 가르치는 영국 남자가 대학 동창 부부의 런던 집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후 벌어지는 익살스러운 해프닝과 인간 관계의 엇갈림에 대한 이야기.
▶ 말번힐스 : 런던에서 활동하던 무명의 싱어송라이터인 '나'는 누나 부부의 시골 카페 일을 도우며 지내는데, 그러던 중 프로 뮤지션 부부를 만나 경험하게 되는 삶에 대한 인식과 인생의 운(운명)에 대한 이야기.
▶ 녹턴 : 무명의 못생긴 섹소폰 연주자가 성형수술을 받고 고급 호텔에 머무는데, 남편과 이혼 후 마찬가지로 성형수술을 받은 린디 가드너(첫 번째 작품인 크루너에 나왔던 토니 가드너의 부인)가 옆 방에 머물면서 함께 벌이게 되는 우스꽝스런 해프닝과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 첼리스트 : 밴드 연주자인 첼리스트 '나'는 몇 년 전 헝가리인 젊은 첼리스트를 만났는데, 당시 첼로에 조예가 깊다고 말하는 미국인 중년 부인이 등장해 젊은 첼리스트와 예술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건을 회상하면서 보여주는 예술의 허상에 대한 이야기.
유려한 문체라든가 격정적인 전개 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야기의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조금 기묘하고 기발한 해프닝들이 일어나곤 하지만 그 안에도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한 연민, 또는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이기에 벌이는 행동이라며 보듬어주는 손길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5가지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첫 번째 작품인 '크루너'다.
이야기의 중반까지만 해도 왕년의 인기스타였던 토니 가드너가 부인을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화자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부르며 끝내는 훈훈한 마무리 또는 부인의 식어가는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애쓰는 잔잔한 마무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인간의 어긋난 욕망을 담담하게 짚어낸 반전이 있었다.
"... 그래서 아내가 저기서 울고 있는 거라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아내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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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인지 저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가드너 씨. 그런데 왜 부인과 헤어지신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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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제 나는 주류 가수가 아니오... 나는 더 이상 스타가 아니라오... 하지만 컴백이란 쉬운 게임이 아니라오... 현재의 존재 방식을 바꿔야 하는 거요. 나아가 사랑하는 것들까지 바꿔야 할 경우도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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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너 씨, 지금 당신 말씀은 컴백을 하기 위해 부인과 헤어져야 한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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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을 성공적으로 해낸 친구들 말이오. 그들은 모두 예외없이 재혼한 이들이오... 나와 린디는 웃음거리 재고품이 되어가고 있다오...우리는 그 일을 두고 의논했소. 그녀는 이제 우리가 헤어져 각자 제 길을 갈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소... 이건 린디를 위한 것이기도 하오. 그녀는 아직 그렇게 늙지 않았소. 그녀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을 때 출구를 찾아야 한다오. 또다시 사랑을 찾을 가능성, 또 다른 결혼을 할 가능성 말이오."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27년간을 부부로서 살아오면서, 여전히 사랑을 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헤어지기로 마음먹는 것. 지금까지 이룬 부와 명예만으로도 만족하고 살 순 있지만, 그럼에도 컴백이란 걸 준비하게 된다면 주변의 성공 공식처럼 존재 방식,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바꿔야 한다는 것.
인간의 어긋난 욕망, 끝을 모르는 욕망에 대한 씁쓸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문체와 상상력에 어느새 빠져든다.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스타트, 크루너.
크루너 외 다른 작품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예상 밖의 이야기 전개가 참신하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느껴지기에 '이거 참'하며 쑥스럽지만 담백하게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녹턴과 함께한 호주 여행은, 성공적!
덧, 외국인들은 비행기 안에서 독서를 많이 하더라.
괜히 경쟁심에 열심히 읽다보니 빠져든, 녹턴~.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