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여름이었는데,
작가의 서랍 속에 넣어두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 꺼내보니 벌써 가을이 되어버렸다.
폭염의 막바지, 여름의 절정 속, 시원한 카페에 앉아 이 책을 덮으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각자의 일들로 분주한 카페 안도, 무성한 잎사귀를 늘어뜨린 창밖의 가로수들도, 이 모든게 너무나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불과 4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죽음이 뭔지나 알았을까. 고작 중학생인 소년이 친구의 손을 놓쳤고, 도망쳤고, 그리고 총에 맞은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으며 시민군에 합류했고,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위로를 건내야만 했던 상황들이 벌어진지 불과 4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새카맣게 잊고야 말았다는 것이, 지금의 평온함이 꽤나 불편했다.
불편하다.
책의 묘사가 너무 생생했다.
터무니 없는 죽음과 인간의 존엄성이 한없이 훼손된 상황들을 너무나 덤덤하게 그려냈다. 작가는 내게 슬픔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담백한 상황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현실은 늘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함을 마주해야만 한다.
"History not remebered is repeated."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잊지말자. 오늘 이 평온함과 자유로움의 소중함을.
느슨한 의식이 언젠가는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용인하게 된다는 것을.
오랜만에 소설을 읽다보니 감정이 격해졌다.
아무튼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요즘처럼 현대사,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에 관심이 증폭된 시기라면 한번 쯤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에 소개를 시작해 보려한다.
이 책은 중학교 3학년인 동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에 참여하면서, 동호를 중심으로 정대, 진수, 은숙, 선주 등 함께 시민군에 참여했던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은 총 6개의 장과 에필로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화자(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와 시점이 달라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다음은 간단한 내용 정리)
1장. 어린 새 - 정대의 죽음으로 시민군에 참여한 동호가 계엄군의 충정작전을 기다리는 동안 일어나는 상황들
2장. 검은 숨 - 죽은 정대의 혼이 무차별적인 죽음을 당한 시민들의 상황을 처절하게 보여줌
3장. 일곱개의 뺨 - 5.18 이후 약 5년 후, 은숙의 이야기. 동호를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5.18의 상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모습.
4장. 쇠와 피 - 5.18 이후 약 10년 후, 심리부검 인터뷰 형식으로 당시 시민군에 참여했고 비인간적인 고문과 감옥 생활을 견딘 김진수와 김영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줌.
5장. 밤의 눈동자 - 5.18 이후 약 20년 후, 선주의 이야기. 심리부검 인터뷰를 준비하며 죽는 것보다 못한,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5.18과 그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
6장. 꽃 핀 쪽으로 - 5.18 이후 약 30년 후, 동호의 어머니 이야기. 남은 유족들의 슬픔과 온전한 생활이 불가했던 이야기를 들려줌.
에필로그... 에필로그의 내용은 정리를 생략한다. 에필로그야말로 작가가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어쩐지 절실함마저 느껴지는 역사의 한 장면과 우연이 겹치는 내용이라 직접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소설을 이처럼 꼼꼼하게 읽진 않을텐데,
마침 독서모임에서 발제를 맡기도 해서 더욱 열심히 들여다 본 것 같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지만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왜 이 책이 맨부커 상의 수상작인지, 나는 모르는 문학적인 가치가 높은 책인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 속을 살아갔던 우리 이웃들, 평범했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귀 기울일 수 있었던 독특한 전개 방식과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게 되었달까. 더불어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느꼈던 작가의 인간 혐오 또는 인간의 폭력성에 기인한 혐오의 감정을 소년이 온다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는데, 이런 의문에 대해 작가가 인터뷰 상에서 언급한 핵심들을 토대로 간단히 서평을 남겨볼가 한다.
"존엄과 폭력이 공존하는 모든 장소, 모든 시대가 광주가 될 수 있다."
왜 광주였을까.
우리는 모두 원하는 삶을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이런 욕망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제도이자 의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신군부의 집권, 그리고 뿌연 안개같은 정국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 사회를 꿈꾸었을테다. 80년 5.15 서울역 광장에서 대학생 10만명이 참가한 시위를 계획했으나 무산되고, 5.17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생 시위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 유독 광주에서는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체포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시민이 참가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정치적인 해석들도 가능하겠지만, 민중의 저항권 행사이자 '시민'의 개념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 곳이 바로 광주였다. 개인이 가진 시민이라는 하나의 의식, 또는 개념이 사회 단위에서 연대성을 발휘하게 된 곳,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지식인(당시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전체(일반 시민)에까지 연대의식으로 나아간 발전이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폭력은 비단 군부 세력에서부터 시민으로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p212>
진압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사건 후에 가지게 되었을 트라우마, 최정점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아무런 의식없이 때로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게 무자비하게 자행된 폭력으로 말미암은 피폐함 또한 폭력이 낳은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모든 동시대인들에게 국가(나라)란 무엇이었을까.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가.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p17>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여야 하니깐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거야. -p173>
국가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태극기와 애국가를 진실된 국가인 것 마냥,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당성을 필사적으로 보이려 한 것이었을까. 어린 동호의 시선으로 의문을 제기한 부분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민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는 초등학교 교과서 상의 민주주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현대사는 무엇이 빠져버렸기에 고작 태극기와 애국가로 나라(국가)라는 존재를 되새겨야 했던 것일까.
인간은 무엇인가.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일가?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라도 무엇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소설 속의 계엄군은 항복하기 위해 일렬로 나란히 걸어오는 아이들을 빨갱이라며 기관총으로 난사해버린다. 설령 빨갱이였다한들, 사상적인 차이가 무엇이길래 손을 들고 걸어오는 아이들을 죽여버려야했을까. 베트남 전쟁에서 무장공비를 셀 수 없이 죽인 일들을 자랑하며 사람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잔인성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성선설과 성악설, 성무선악설 중에서 굳이 고르고 골라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또한 그 잔인성을 합리화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팝옵티콘을 설계하며 최신식의, 우수한 감시 원리라며 그 창의성을 추켜세울 때, 빅브라더와 같은 이 감시망 자체가 우리가 가진 폭력성을 '감시'라는 말로 둔갑시킨, 잔인함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소년이 온다를 통해 광주에서 확인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기 보다는,
폭력성과 잔인함을 내재한 불완전한 인간 개개인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나와 너가 아닌, 우리로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희망의 스토리이지 않았을까.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기 무섭게 찬바람이 매섭게 느껴진다.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루는 컨텐츠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이것만은 잊지말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